할리웃보울 시즌이 한창이다.
남가주의 여름에서 할리웃보울을 빼고 나면 남는 것이 없어 보일 정도로 도심 산속에 자리잡은 야외음악당은 최고의 문화공간이요, 피크닉 공원이며, 만남과 회동의 장이다.
한번 다녀오려면 여러 가지가 번거롭기도 하지만, 일단 가서 앉으면 언제나 “아, 정말 좋다!” 소리가 절로 나오는 자연극장, 탁 트인 해방감 속에 수준높은 공연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우리는 언제든 맘만 먹으면 갈 수 있기 때문에 별로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할리웃보울은 ‘서부의 카네기홀’이라고 불릴 만큼 세계적인 연주자들이 그 무대에 서고 싶어하는 꿈의 공연장이다. 지난 90여년 동안 클래식과 대중음악 분야의 전설적인 연주자들이 이곳에서 데뷔했으며, 긴 세월만큼이나 수많은 역사가 창조되고 기록됐다. 타임라인을 들여다보니 의외의 재미있는 자료들이 많이 보인다.
할리웃보울에서 열린 최초의 공식 연주회는 1922년 7월11일 알프레드 허츠가 지휘하는 LA 필하모닉의 ‘별밤의 심포니’ 콘서트였다. 당시 입장료는 25센트.
보울 무대에 오른 최초의 여성 지휘자는 1925년 영국 출신의 작곡가 겸 지휘자 에델 레진스카, 최초의 흑인 남자 연주자는 1932년 독주회를 열었던 테너 겸 작곡가 롤랜드 헤이즈였다.
아시안으로는 일본인 히데마로 고노에가 1937년에 처음 지휘봉을 잡았고, 한국계로는 바이올리니스트 새라 장이 열 살이던 1992년에 이 무대에서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콘첼토를 연주했다. 새라 장은 22세이던 2004년 할리웃보울 명예의 전당에 최연소자로 이름을 올렸다.
보울 무대에서 결혼한 사람도 있다. 1928년 여름 호주 작곡가 겸 지휘자 퍼시 그레인저는 자신의 작품을 초연한 후 무대 위에서 스웨덴의 여류시인 엘라 비올라 스트롬과 결혼식을 올려 화제가 됐다.
1942년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협연했는데 연주가 끝나자마자 라흐마니노프가 직접 무대로 올라와 호로비츠의 손을 잡고는 “이 연주야말로 내가 늘 꿈꿔왔던 바로 그 연주”라고 칭찬했다. 호로비츠는 훗날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스트라빈스키는 80세 생일기념으로 LA 필하모닉과 함께 자신의 작품 ‘봄의 제전’과 ‘불꽃놀이’를 지휘했고(1962년), 비운의 첼리스트 자클린 뒤프레가 남편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하는 LA 필과 함께 생상스의의 첼로 협주곡 1번을 협연했으며(1968년),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고별공연(2005년)을 가진 곳도 할리웃보울이다.
클래식 음악 공연장이었던 할리웃보울에서 처음 재즈가 공연된 것은 1936년 베니 굿맨의 연주였고, 대중가수로 처음 이 무대에 올라 LA 필과 협연한 사람은 1943년 프랭크 시내트라였다.
1964년 비틀스의 할리웃보울 데뷔는 1만8,000장의 티켓이 3시간만에 동이 난 엄청난 사건이었다. 비틀스는 이듬해 다시 보울을 찾았고, 캐피톨 레코드는 ‘비틀즈의 할리웃보울 공연’ 음반을 따로 발매했다. 2014년에 비틀스 데뷔 50주년 공연이 열렸는데, 그 옛날 이곳에서 열광했던 틴에이저들이 노인이 되어 보울을 가득 메우고 추억에 빠지기도 했다.
불꽃놀이와 함께 연례행사가 된 ‘차이코프스키 스팩태큘라’ 콘서트는 1969년 시작돼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가장 인기있는 공연 중 하나인 ‘레개 나잇’은 2002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다. 또 한국일보가 주최하는 ‘코리안 뮤직 페스티벌’이 2003년부터 14년째 열리고 있는 사실도 할리웃보울 역사에 기록돼있다.
엊그제 친구들과 어울려 기타리스트 제프 벡 50년 기념공연을 다녀왔다. 제프 벡 하나만도 전설이지만 기라성 같은 역전의 노장 버디 가이와 스티븐 타일러, 그리고 베스 하트까지 출연한 록과 블루스와 재즈의 밤이었다. 공연 전에 너무 많이 먹고 마셔서 반은 졸다 깨다 하면서 봤지만 오랜만에 소리도 지르고 몸도 흔들었던 흥겨운 시간이었다. 이 공연도 얼마 후에는 역사요 전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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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 부국장·특집 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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