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이민와서 일때문에 만난 미국인 친구가 있다. 처음에 일로 만나 함께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하느라 일주일에도 서너 번 이상을 만나며 가족보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눴다. 더 나은 결과를 위해 서로 의견을 제시하고 절충하며 함께 꽤 오래 지내다보니 우리의 다른 점은 그냥 피부색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적과 인종, 피부색, 언어 그리고 다른 색의 눈동자를 가졌지만 우리는 다 같은 인간이구나 생각하니 우린 어느새 단짝 친구가 되어 있었고, 서로의 나라에 관심과 존경, 사랑을 느끼기 시작했다.
오히려 지금보다 영어가 더 거침없었던 유학시절 만난 미국인 친구와 끝끝내 걷어낼 수 없었던 이질감과 눈에 보이지 않아 더 답답했던 벽이, 햇빛에 안개 걷히듯 맑고 투명해지는 느낌이었다. 며칠전, 그 친구가 물었다. 요즘 너의 조국때문에 네가 많이 아프겠다고. 낯선 땅에서 만난 그 친구의 말이 어찌나 뜨겁던지 눈물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요즘은 부쩍 고개를 떨구고 뉴스만 읽어댄다. 그리고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며 생각하는 시간과 땅 꺼질 듯한 한숨도 늘었다. 거대한 자연재해나 인명사고 외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이제 떠나온지 오래되어 담담해졌을 것만 같았던 고국을 향한 마음이 이렇게나 뜨거웠었는지 싶어 새삼스럽기도 하다. 가슴속에서 곪을지언정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던 생각과 울분이 하루에도 몇 번씩 고개를 쳐들고 삐죽거리며, 사춘기소녀의 빨간 여드름마냥 불쑥 불쑥 올라온다.
생일케익에 켜놓은 촛불을 소원도 불지 않았는데, 이유 없이 지나는 바람이 훅 꺼버리는 황당한 일들의 반복이 많았다. 그동안 그리 오래도록 갈망하던 촛불에 담은 소원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거나 혹은 눈만 감아도 코 베이듯 실종되는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었다.
결혼 후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이민 2세대 친구가 전화 왔다. 애교 많던 딸이 떠난 자리가 너무 허전해 적적해 하시는 부모님을 친구대신 명절 때마다 찾아뵙고 있던 터라 미국의 큰 명절 중 하나인 추수감사절이라 안부전화를 한 것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친구대신 작은 선물을 들고 그 부모님을 찾아뵈었다.
친구 부모님께서 말씀하셨다. “딸 대신 우리를 찾아와 준 고마운 네 대신 한국말도 서툰 누구누구는 한국에서 촛불 들고 광장에 나간단다”. 어딜 가도 무얼 해도 눈물바람이다. 무심히 제 할일 하듯 흘러가는 시간과 일상들이 소설속에서 지어낼 공상과 막장드라마에 나오는 말도 안 되는 에피소드가 현실에 존재하며 일상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서글퍼 한국과 미국에서 함께 울고 있다. 하지만 바람이 불어도 어디서든지 촛불은 또 다시 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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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다미 /갤러리 부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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