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가슴 벅찬 감동이, 때론 말 못할 슬픔과 절망, 고단함이 우리의 삶에는 있다. 특히 낯설고 물 선 이국땅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 한인들에게는 결이 다른 스토리들이 저마다의 가슴 속에 내장돼 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 속, 이제는 잔잔한 강물처럼 침잠됐을 워싱턴 지역 한인들의 초기 이민생활의 애환과 남다른 사연을 들어본다.
<편집자 주>
내가 이민 왔던 1970년대의 미국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그땐 한 마디로 여유로움이 있었다. 그 당시 미국 중산층의 삶은 미국의 국민만화 ‘블론디’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보통 부인들은 집에서 살림하며 아이들을 키우고, 남편들은 직장에서 닷새 동안 일했고 주말은 잔디도 가꾸고 가족들과 함께 보냈다.
달랑 이민 가방 두 개만 들고 온 우리 한인들도 10년 정도 열심히 일하다보면 블론디처럼 짧은 치마에 하이힐을 신고, 나지막한 하얀 울타리가 있는 아담한 집에서 강아지도 키우며 살 수 있는 기회의 나라였다. 열심히 사는 만큼 되돌아오는 세상이 미국이었다. 그러나 지금 ‘아메리칸 드림’은 그야말로 드림이라고 한다.
미국에서 이민자로 거의 반세기를 살아냈다. ‘살아낸다’는 말은 백인들의 텃세에 소수민족으로 잘 견딘다고 해야 할까. 미국에서 화이트가 아닌 피부로 산다는 것은 늘 도전이었다.
그러나 인종편견이 심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후, 백인들은 근거 없는 적자라는 우월성을 꺼내 들고 좀 더 노골적으로 그들의 감정을 나타낸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있었던 일이다. 나와 남편은 로마에서 필라델피아로 오는 아메리칸 에어라인의 앞뒤로 자리 잡았다.
우리 줄을 맡은 스튜어디스는 50대의 땅땅하고 인상이 별로인 백인 여성이었다. 식사가 두 번 나왔다. 처음 것은 입에 맞지 않아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그녀가 두 번째 식사를 내 옆의 손님에게 전하고 그냥 지나려고 했다. 이어폰을 벗고 그녀를 불러 세웠다. 음료와 메뉴를 고를 것을 물으리라 기대하면서. 그러나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Yes”라고 해놓고 말이 없다. 몇 초 동안 그녀의 침묵은 나를 향한 무시와 거부였다.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나 “내가 택할 메뉴가 뭐죠?”라고 물었다. 그 말은 싸우지 않겠다는 나의 비겁함이었다. “아! 미안해요. 안 드시는 줄 알고….” 그녀의 미안하다는 말은 공기보다 더 가벼웠다.
온전한 사람이 없듯 완전한 나라가 있겠는가.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미국은 복잡하고 미묘한 사회적 문제들로 얽혀있다.
그래도 난 미국은 그런대로 좋은 나라라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그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미국의 독립선언서의 정신이 깔려있는 법치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종차별로 인한 갈등은 세상이 있는 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비극이 아닌가 싶다. 나와 비슷한 사람과 같이 있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능 때문일까.
그래서 우리 이민자들은 이곳에 발을 붙이고도 늘 고향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요즈음은 또 ‘코로나 19’ 때문에 혹시 나를 중국인으로 오해해 엉뚱한 피해를 입지나 않을까 기침도 제대로 못하며 몸과 마음을 사리며 지낸다.
<
문영애 (워싱턴 문인회 부회장)>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