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 장학금 수여식 때 김웅수 전 이사장(가운데)에게 감사패를 수여하는 장면. 오른쪽은 아들 김용회 당시 한미장학재단 동부지회장, 왼쪽은 당시 전국 이사장이었던 필자.
문득 꺼내든 빛바랜 사진에는 잊을 수 없는 추억과 얼굴들이 있다. 오래 전, 독자들이 각종 행사나 모임 등에서 찍은 옛 사진을 앨범 속에서 꺼내 공유하는 코너를 마련했다. 독자들이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추억의 사진을 직접 골라 간단한 사연과 함께 본보에 보내주면 모든 한인들과 함께 추억을 나누고자 한다.
지나간 날들을 돌아보면 후회가 되는 일도 있고 보람을 느끼는 일도 있다. 나는 한미장학재단 이사로 지난 40여 년 봉사해 오면서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 어려운 형편에 있는 학생들을 돕는 일뿐 아니라 이 과정을 통해 만나는 분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분이 고 김웅수 장군이다.
1983년 당시 한미장학재단 회장이었던 전화영 박사가 재임 중 별세하면서 김 장군이 회장직을 맡게 됐다. 나는 체구가 작고 온화한 모습에 조용한 목소리로 대화를 하는 김 장군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5.16 군사혁명을 끝까지 반대하다 옥고를 견디고, 청렴한 군인으로 지조를 지키면서 늦은 나이에 유학을 와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해 교수가 되었고 장로가 되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김 장군이 회장을 맡은 후 곧 조직은 활기를 띠었다. 이사직에 많은 여성들을 참여시키고,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해서 LA와 뉴욕에 지부를 창설하고, 유명 기업과 인사들을 통해 20만 달러가 넘는 기금을 조성하기도 했다. 6.25 전쟁 직후 워싱턴에서 박원규 장로, 박영환 장로 등 몇몇 유학생들이 시작한 장학회는 올해 51주년을 맞게 되었고, 한미 장학재단으로서 현재 400여 만 달러의 기금을 보유하고 1년에 전국 7개 지부를 통해 40여 만 달러의 장학금을 수여하는 전국적인 장학기관으로 발전했다.
그는 부인 박실모 여사가 세상을 떠난 후, 한국으로 이주하면서 자신의 재산 25만 달러를 와싱톤한인교회의 시니어 복지를 위해 헌금했다. 이로 인해 교회에 웅수 시니어 아카데미가 6년 전에 생겼고, 이번 5월에 증축되는 건물에 ‘웅수 라운지’가 생기게 되었다. 그는 2018년 2월에 9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나는 장학재단을 통해 인격적으로 존경하고 한인사회의 거목인 분을 가까이 모시며 지낼 수 있었던 것을 큰 축복으로 생각한다. 37년 전 김웅수 장군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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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남 (전 한미장학재단 전국 이사장·VA 리스버그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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