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상구 (전문의)
때로는 가슴 벅찬 감동이, 때론 말 못할 슬픔과 절망, 고단함이 우리의 삶에는 있다. 특히 낯설고 물 선 이국땅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 한인들에게는 결이 다른 스토리들이 저마다의 가슴 속에 내장돼 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 속, 이제는 잔잔한 강물처럼 침잠됐을 워싱턴 지역 한인들의 초기 이민생활의 애환과 남다른 사연을 들어본다.
<편집자 주>
1960~1970년대 당시 의과대학 교수들은 미국통이 많았기 때문에 지도교수로부터 미국에서 전문의 수련을 마치고 자격을 얻은 후 귀국하라는 조언을 받았다. 일찌감치 미국 유학을 꿈꾸며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올 것을 기대하며 졸업하자마자 군의관으로 입대했다.
1970년 6월 29일 판아메리칸 항공기로 일본 하네다 공항을 거쳐 뉴욕 케네디 공항에서 처음 미국 땅을 밟았다. 수중에는 한국은행에서 유학생에게 환전해 준 100달러뿐이었다. 일본에서 샌드위치 하나를 거금 7달러에 사 먹고 드디어 미국 병원 인턴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마운트사이나이 학교의 부속병원인 앰허스트 제너럴 병원(Elmhurst General Hospital)에서 인턴 수련을 시작했다. 한국 의사들이 많지 않았던 시기라 변변치 않은 영어 실력으로 100명 이상의 인턴과 레지던트 숙소에서 생활하면서 미국에 대한 부푼 기대와 꿈은 사치로 느껴질 만큼 하루하루 생존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고 숨이 차올랐다. 하루 쉬고 하루 당직하는 혹사를 당하면서 당직실에서 병원까지 긴 홀웨이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병실로 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무척 불편했다. 외국생활이라곤 고작 대한민국 군의관으로 월남에 파병되어 일년 남짓 퀴논에 위치한 후송병원에서 근무한 경험 밖에 없는 나로서는 전혀 다른 문화권과 특히 언어의 장벽 때문에 곳곳에서 발생하는 많은 어려움과 불이익도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어 무척 힘들었다.
당직할 때는 아예 병실에서 자고 먹으면서 경증이거나 불면증 환자에게서 영어를 배우고 필요한 치료를 해 주기도 했다. 그런 행동이 미국인 의사와 간호사에게 성실한 의사로 비쳐져 좋은 추천서를 받은 것이 나의 삶에 큰 도움이 됐다.
성공의 비결은 전문지식도 중요하지만 대인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했던가? 미국이 기회와 축복의 땅이라는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개인의 능력을 인정해 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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