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가슴 벅찬 감동이, 때론 말 못할 슬픔과 절망, 고단함이 우리의 삶에는 있다. 특히 낯설고 물 선 이국땅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 한인들에게는 결이 다른 스토리들이 저마다의 가슴 속에 내장돼 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 속, 이제는 잔잔한 강물처럼 침잠됐을 워싱턴 지역 한인들의 초기 이민생활의 애환과 남다른 사연을 들어본다.
<편집자 주>
인간을 연구하고 인간이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아 사회복지학(Social Work)의 매력에 빠졌기에 미국에서 공부할 기회가 와서 1997년 한국을 떠났을 때만 해도 나는 두렵기는커녕 젊음의 무지막지한 포부로 가슴이 벅차올랐었다.
그러나 첫 학기를 마치기 직전 12월 고국 한국에서는 IMF 사태가 있었고 환율이 1달러에 1,900원까지 치솟았다. 학업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귀국한다는 유학생들이 속출하고 나 역시 다음 학기 등록금 걱정으로 고민하게 되었다. 학내 도서관에서 파트 타임으로 생활비를 벌었지만, 등록금을 마련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이었다. 이대로 꿈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다시 귀국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에 밤잠을 설쳤다.
새학기가 시작되고 등록금을 내야 할 때가 다가와, 우연한 기회에 대학원내에 꽤나 높으신 분을 만나 고민을 털어놓게 되었다. 나같이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어서 액센트가 있는 국제 학생들에게 늘 친절하게 대해 주시던 그분의 성함은 엘리자베스였다.
어색한 영어로 울먹이던 나의 사연을 듣더니 그 분이 내 손을 가만히 잡아주시며 “밥은 잘 챙겨먹고 있니?”라고 위로해 주셨다. 그리고 며칠 후 그분의 비서로부터 연락이 왔다. 환율이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1년간 학비를 내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조치를 해 주고 필요할 경우 국제학생이지만 생활비까지 학자금 융자를 해 주겠다는 소식이었다.
그분의 지원 덕분에 나는 이듬해 무사히 대학원 졸업식에 학사모를 쓰고 참석하게 되었다.
세인트루이스의 구름 한 점 없던 청명한 5월의 졸업식 날 얼마나 많이 눈물을 쏟았던가. 이 학위를 통해 나는 어떤 일에 쓰임받을 수 있을까 신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20여년이 지나고 나는 여전히 미국에서 사회복지사로 한인 입양인들을 섬기고 있다.
<
송화강 (VA, 아시아패밀리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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