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요즘 한국이 참으로 고맙고 감사하다. 그 옛날, 온 국민이 어렵고 힘들고 가난했었는데 이제는 여러가지로 온 세계가 알아주는 대한민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난 내 나름대로의 코리안-아메리칸 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산다.
1974년 알래스카 앵커리지 공항에서 영주권과 SSN 카드를 받고 다음 날 취업한 집에 가니, 그림 같은 26에이커에 화장실이 9개나 있는 어마어마한 대저택, 한국에서는 그런 집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 집에서 일하던 직원이 내게 집을 보여주며 “너네 나라 한국 대통령도 이렇게 멋지고 좋은 집에서 못살거야, 그렇지?”, “너희 나라 TV는 있냐?” 등의 말에 그 당시 무척 배알이 꼬였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직원을 노려보며 속으로 외쳤다. ‘당신 지금 한 말 언젠가는 그 입 속으로 다시 넣을 날이 꼭 올테니까’ 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다음에는 MVA에서 일하는 아주 친절한 분을 만났다. 한국에서 올 때 국제면허증을 가지고 왔지만, 다시 시험을 봐야 된단다. 영어로 필기와 실기시험을 두 번 보기 좋게 실패하고 세 번째 시험을 보러가서 필기는 겨우 통과, 실기 때 시험관 백인아저씨가 옆에 탔는데, 대뜸 “너, 한국 사람이야?” 물었다. “Yes” 라고 답하니 자기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사람이라며 반갑다고 하는 순간에 난 그만 브레이크를 밟고 말았다.
놀란 아저씨가 “O, my, my!” 를 외치며 손을 내저었다. 난 속으로 “아이쿠, 또 떨어졌구나”하고 고개를 푹 숙이니, 이 아저씨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Hi, 허니(Honey), 저 앞에 가면 스탑 사인이 있는데, 천천히 가서 꼭 스탑해, OK?” 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해서 어렵사리 면허를 땄다.
자동차 사려고 은행에 가서 대출을 받으려니, 매니저가 코사인 할 사람을 데려오란다. 나는 아주 서툰 영어로 “코사인 해줄 사람이 있으면 당신 안 찾아왔소” 했더니, 아래위로 훑어본 뒤 “얼마나 필요해?” 하더니 내가 요구하는 금액을 대출해 주었다. 차가 생기고 내 엄청난 이민생활은 본격 시작되었다.
<
구인숙 (MD 연합여선교회 증경회장)>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