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벨기에 브뤼셀의 중심가에 있는 한 나이트클럽, 주말 밤 자정이 지나자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강한 비트와 베이스의 음악이 귀청을 울렸고, 바에 모인 사람들은 거나했으며, 붉은 조명이 돌아가는 댄스플로어에서는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을 신은 여성들이 신나게 몸을 흔들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풍경 사이로 한 무리의 ‘이상한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쭈글쭈글한 백발의 노인들. 남자들은 정장을 빼입고 손수건까지 꽂았고, 여자들은 눈 화장에 마스카라,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주렁주렁 목걸이와 스팽글 달린 상의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이 ‘야한’ 할머니할아버지들이 플로어에 오르자 분위기는 일순 달라졌다. 손자손녀뻘 젊은이들이 파트너가 되어 함께 춤을 추자 환호가 쏟아졌고 여기저기서 핸드폰으로 이들을 촬영하느라 난리였다.
“40년 만에 처음 이런데 왔다”는 99세 할아버지는 “클럽의 활기 넘치는 분위기가 너무 좋고, 색다른 경험에 흥분된다.”며 새벽 2시까지 플로어를 떠나지 않았다.
이들은 인근 요양원에 거주하는 80~90대의 노인들로, 파피 붐(Papy Booom)이란 단체의 주선으로 클럽을 찾은 것이었다. 파피 붐은 유럽사회에서 날로 증가하는 노인들에게 외로움을 해소하고 보다 즐거운 삶을 제공하기 위해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는 비영리단체다. 전에는 해변나들이나 외식 같은 행사를 주최했지만 이런 활동들이 진부하게 느껴지자 색다른 이벤트를 모색해왔다. 그 결과 지난 2년 동안 5회의 나이트클럽 모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열기구 타기, 비디오게임의 밤, 데이 레이브 파티를 기획해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사람들의 수명이 길어지고 노인 인구가 늘어나면서 현대사회가 당면한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노인의 삶의 질에 대한 고민이다. 무엇보다 ‘사회적 고립’ 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심각한데, 친구나 가족의 방문이 거의 또는 전혀 없는 노인들은 작은 공간에서 장기간 고립되어 육체의 쇠퇴보다 정신적 외로움에 지쳐서 빠르게 늙어간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전 세계 노인 4명 중 1명이 사회적으로 고립되어있으며 그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 건강한 노년을 위해 전문가들이 적극 권장하는 것이 ‘춤’이다. 운동이 되고 사회적 연결도 되며 스트레스 해소에도 좋기 때문이다. 브뤼셀의 나이트클럽을 찾은 노인들이 좋은 예다.
춤은 노인에게 최고의 운동이다. 다양한 동작을 하며 평소 잘 쓰지 않는 근육을 움직이면 근력을 키울 수 있고, 뇌를 자극하여 기억력, 주의력 등 인지기능이 개선된다. 유산소운동이라 심장건강도 좋아지고, 뻣뻣해진 신체를 이완시켜 유연성과 균형감이 향상되면 낙상위험도 줄어든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면 스트레스 해소는 물론 감정도 순화되기 때문에 뮤직 테라피의 효과도 있다. 또 사람들과 함께 추면서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하게 되어 외로움과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다.
무엇보다 댄스클래스는 신나고 재미있다. 힘들고 지루한 피트니스운동에 비하면 얼마나 즐거운가! 그러고 보니 춤은 나쁜 게 하나도 없어 보인다. 자칫 넘어지거나 삐끗하면 부상의 위험이 있지만 쉽고 단순한 동작, 관절과 근육에 무리가 없는 범위에서 춤추면 예방할 수 있다.
춤 얘기가 나온 김에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춤은 나의 오랜 로망이었다. 한 번도 배운 적은 없지만 다시 태어나면 댄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다.
아들이 대학에 들어갔을 때, 이젠 나도 하고 싶은 걸 해야겠다며 타운에 있는 스튜디오를 찾아갔다. 재즈댄스를 하고 싶었는데 첫 시간부터 타박을 받았다. 기초체력이 너무 없어서 이런 몸으로는 춤을 출 수 없다는 거였다. 그때부터 필라테스를 시작했고, 이 운동을 지금까지 만 15년이나 계속해왔다. 그리고 사실 그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춤추고 싶은 갈망을 달랠 수는 없어서 댄스 클래스들을 기웃거렸다. 미국 스튜디오에 찾아가 창 너머 수업광경을 지켜보다 온 적도 있고, 어디 춤을 가르치는 곳이 있다 하면 쫓아가서는 슬쩍 보기만 하고 돌아왔다. 문제는 쑥스럽고 부끄러워서 등록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주변에 춤 좋아하는 친구가 없으니 혼자서는 이게 잘 되지 않았다. 지금은 많이 후회한다. 왜 용기를 내지 못했을까? 그때부터 춤을 추었더라면 지금은 얼마나 다른 내가 돼있을까?
결국 춤을 추고 싶다는 꿈은 춤을 보는 것으로 달래게 되었다. 워낙도 댄스공연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좋은 공연이 올 때마다 열심히 찾아다닌다. 집에서도 심심하면 유튜브나 스트리밍으로 발레공연, 춤에 관한 영화, 다큐멘터리, 오디션, 심지어 매년 ‘월드 발레 데이’에는 세계 각국의 발레단 무용수들이 몸 풀고 연습하고 리허설하는 모습을 몇 시간이고 지켜본다.
그렇게 춤에 대한 열정이 사그라진줄 알았는데, 브뤼셀의 노인들 스토리를 읽다보니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이제라도 나갈까, 어디로 가야하지, 이 나이에 받아주는 곳이 있을까, 몸이 생각대로 움직일까… 이런 생각들 때문에 결국에는 또 주저앉고 말겠지. 아, 정말이지 다 늙어도 노는 할머니, 끼 있는 할머니, 춤추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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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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