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필하모닉의 2026년 새해 첫 프로그램은 에사 페카 살로넨이 이끄는 2개의 큰 무대였다. 9~11일, 스크랴빈의 교향시 ‘프로메테우스, 불의 시’를 주인공으로 한 프로그램이 오감을 황홀하게 유린한 데 이어, 17~18일에는 협주곡 사상 가장 크고 길고 방대하기로 유명한 부조니의 피아노협주곡을 완주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이 연주회들은 살로넨이 다음 시즌부터 LA필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reative director)라는 새로운 직책을 맡는다는 발표가 나온 후의 첫 무대여서 기대와 감동이 더 컸다.
현대음악계에서 가장 미래지향적인 지휘자로 꼽히는 살로넨은 17년(1992~2009)간 LA필의 음악감독이었고, 이후 계관지휘자(conductor laureate)로서 매년 LA를 찾아 음악팬들과의 소통을 이어왔다. 그가 떠나면서 후임자로 데려온 구스타보 두다멜 역시 17년(2009-2026)간 오케스트라를 정상으로 이끈 혁신과 열정의 화신이었으니, 두 사람이 LA필의 전성기를 만든 일등공신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곧 두다멜은 뉴욕필로 떠나고 아직 후임이 정해지지 않아 그 공백이 염려되던 차, 작년 9월 발표된 살로넨의 새로운 역할은 LA 음악계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사실 이것은 개인적으로 오랜 마음속 염원이었다. 두다멜에 대한 팬심은 그대로인 채, 살로넨이 매 시즌 몇 주 정도 디즈니홀을 찾을 때마다 그의 날카롭고 이지적인 연주에 매료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지난해 5월, 그가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의 음악감독을 사임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우리가 그를 다시 모셔올 수는 없는 건지 혼자 자문해보곤 했다. 아마 이런 마음이 한둘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살로넨은 LA필을 떠난 후, 영국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수장으로 옮겨가 2008년부터 2021년까지 이끌었고, 2020년 SF심포니의 음악감독 취임했다. 하지만 SF심포니를 위한 그의 야심찬 기획들은 팬데믹으로 인해 무너져버렸고, 이후에도 재정적자를 이유로 이사회가 예정됐던 프로그램들을 줄줄이 취소하자 살로넨은 2025년 미련없이 계약을 종결했다. 결국 SF심포니는 살로넨이라는 큰 지휘자를 담을 그릇이 못되었던 것이고, 그런 면에서 세계 최고의 진보적 비전과 열린 마음을 가진 LA필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세계적인 작곡가요 지휘자로 우뚝 선 살로넨을 음악감독이라는 과거의 자리로 부르는 일은 전례 없고도 무례한 처사일 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 모신 경영진의 신의 한수, 사려 깊은 결정에 경의를 표한다. 그는 앞으로 음악감독의 행정적 부담과 책임은 떠안지 않은 채, 조직 바깥에서 오케스트라의 비전을 형성하고 나아가 더 큰 의미의 음악감독으로서 오케스트라의 예술적·사회적 확장을 꾀할 것으로 기대된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임기는 5년이지만 LA필은 그가 계속 임기를 연장하여 오케스트라를 선도해주길 바라고 있다. 살로넨은 2026/27시즌부터 매년 6주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특별 프로젝트와 페스티벌을 기획하며 신작 위촉과 초연을 이끌 예정이다. 또 LA필이 신설하는 ‘살로넨 국제지휘 펠로십’을 통해 젊은 지휘자들의 멘토링도 맡게 된다.(그는 길 건너편 콜번스쿨의 지휘과 학장이기도 하다)
매 시즌 살로넨이 6주를 헌신하고, 두다멜이 4주 정도 돌아와 특별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아직도 노익장을 과시하는 주빈 메타(89) 명예음악감독이 1~2주를 맡아주면 어느 오케스트라보다 빵빵하고 탄탄한 프로그램을 돌릴 수 있게 된다.
아울러 살로넨은 2027년 파리 관현악단(Orchestre de Paris)의 수석지휘자로 부임할 예정인 바, LA필은 파리 오케스트라와 함께 여러 프로젝트를 공동 진행하고 상호 투어를 통해 미래의 음악을 나누는 중요한 역할도 시작하게 된다.
LA필 음악감독의 후임자 물색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하지만 이제는 언제 누가 오더라도 큰 걱정이 되지 않는다. 살로넨이라는 거대한 우산이 공백을 메워주고 오케스트라의 좌표와 방향을 제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지난 주말, 살로넨과 피아니스트 이고르 레빗이 함께 한 부조니의 피아노협주곡은 너무나 특별해서 기억에 오래 남을 연주였다. ‘피아노협주곡의 에베레스트’로 불리는 이 곡은 연주시간이 가장 길고(70분), 가장 많은 악장을 가졌으며(5악장), 마지막에 합창단까지 동원되는 대작이어서 거의 연주되지 않고 있다. 107년 역사의 LA필하모닉도 이번이 첫 연주였을 정도니, 그 특별한 순간을 누렸다는 사실에 자부심마저 느낄 만큼 감동적이었다.
피아니스트, 작곡가, 사상가였던 페루초 부조니(1866-1924)의 역량이 총 집결된, 피아니스트의 엄청난 기교와 음악적 깊이를 요하는 고난도 협주곡으로, 이고르 레빗은 한 인터뷰에서 “너무 어려워서 욕쟁이가 되는 레퍼토리”라고 말한 적이 있다.
워낙 스케일이 커서 협주곡이라기보다 피아노와 함께 하는 교향곡이란 생각이 들었고, 동시대 거장인 말러의 우주적 세계관과 음악적 요소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매스터피스였다. 대작을 완벽하게 연주해낸 레빗과 살로넨, LA필과 매스터코랄에게 박수를 보낸다.
<
정숙희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