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집 떠난 지 십수 년이 넘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딸 아이는 다른 주에 있는 기숙사에 들어가고 둘째는 학교가 멀지는 않았지만 무슨 핑계라도 대어 집을 떠나고 싶었던지 그 젊은 청춘은 짐을 싸서 뒤도 안 돌아보고 홀가분하게 갔다.
아이들은 점점 바빠졌고 내가 모르는 그들의 세계를 넓히고 있었다. 방학 때는 여행을 가기도 하고 어느 해는 일 년이 다 가도록 얼굴 한 번 보기 어려운 적도 있었다. 졸업 후 집과 먼 곳의 직장을 다니게 되면서 시간 내기는 더욱 자유롭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이 집에 오면 손님처럼 느껴졌다. 처음 며칠은 반가웠으나 점점 각자의 집을 편하게 여기게 되었다. 차츰 오는 것이 뜸해지고 전화가 더 잦아졌다. 주로 아이들이 편리한 시간에 전화가 왔다. 내 첫 마디는 늘 “밥은 먹었니” 이다. 전화기 하나로 세계 각국 음식을 다 배달시킬 수 있고 게다가 둘째는 나보다 요리를 즐기는 아이인데 왜 그리 밥은 먹었나가 걱정이 되었는지 모른다.
아이들은 내게 왜 늘 밥 먹었냐고 묻는지 의아해했다. 먹는 일밖에 궁금한 것이 없냐고 말했다. 어련히 알아서 먹고 다니려니 하고 상관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도 나도 모르게 전화를 받을 때마다 물었다.
내가 아파서 며칠째 드러누워 있을 때 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밥은 먹었는지 아이가 먼저 물었다. 밥을 챙길 정신도 먹을 힘도 없었다. 전화를 끊고 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 초인종 소리가 났다. 음식이 현관문 앞에 있었다. 아이가 우리 집 근처 식당에 주문하여 삼계탕과 닭죽과 전복죽을 보낸 것이다. 뚜껑을 열어보니 뜨끈뜨끈했다. 입맛이 없어 깔깔하던 속에 음식을 한 숟갈씩 억지로 떠 넣었다. 며칠 동안 끙끙 앓으며 끼니때마다 죽을 데워 먹었다.
그리고 일어났다. 아이들이 말없이 보내준 밥 덕분이었다. 염려의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밥 속에는 더 이상 아프지 말고 빨리 일어나라는 응원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우리에게 밥은 끼니를 때우는 의미 만이 아니라 서로에게 할 말을 보듬고 있는 인사가 되었다.
밥은 마음을 표현하는 또 다른 언어이다. “식사하셨어요”는 단지 밥을 먹었는지가 궁금한 것은 아니다. 오늘은 별일 없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안부를 묻는 말이다. 밥은 서로를 살뜰히 챙기며 애틋함을 감춘 도구이다. 헤어질 때 인사는 “언제 밥 한번 먹자” 이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을 담은 표시이다. 따뜻한 밥 한 끼가 서로의 관계를 이어주고 삶의 위로와 힘이 된다.
때로는 어색하여 멈칫거리게 되는 순간에 맥락 없이 묻는 다정한 말, “밥은 먹었니”는 움츠러진 마음을 순식간 말랑하게 만드는 놀라운 힘이 있다. 고슴도치같이 바늘이 서 있던 시절, 밥 한 그릇으로 뜨끈하게 데워진 나는 조금 더 다정한 사람이 되었다. 속이 따뜻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밥값 하고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곤 한다. “밥 먹고 합시다” 는 또 얼마나 반갑고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인가.
내가 아이에게 ‘밥은 먹었니’ 묻는 것은 단지 밥을 먹었는지가 궁금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잘살고 있는지, 걱정거리는 없는지, 아프지는 않은지, 묻는 말이다. 운전 조심해라, 옷 따뜻하게 입고 다녀라, 어두운 데서 스마트폰 보지 마라, 입안에서 뱅뱅 도는 잔소리를 삼키며 하는 말이다. 힘들면 언제든지 집에 와 밥 먹으라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전하는 말이다.
“밥은 먹었니?”
<
박연실 수필가>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