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아무도 없는 젊은 부부가 세 번째 아기를 출산했다고 한다. 혼자서 네 살, 두 살짜리 꼬마와 함께 신생아까지 돌봐야 할 딱한 처지라. 크리스마스 날 오후에 친구랑 둘이 그 집을 방문했다. 친구는 간 절인 고등어랑 잡채, 꽃 리본을 예쁘게 장식한 롤케이크까지 챙겼지만, 천성이 무심한 나는 달랑 기저귀 한 박스만 샀다.
여러 동이 군집한 아파트라 번지 찾기가 쉽지 않았다. 전화를 걸었다. “차는 못 들어와요. 걸어서 들어오세요.” 마치 음식 배달부에게 하는 말 같아 조금 머쓱했다. 친구는 무거운 음식 보따리를, 나는 눈앞을 가로막는 커다란 기저귀 박스를 안고 낑낑대며 이 건물 저 건물을 헤매어 겨우 집을 찾았다. 아파트 문을 여니 꼬마 둘이 식탁에 오로록 앉아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고 식탁 아래에는 밥풀이랑 콩나물이 아이들의 발 사이로 보였다.
포대에 꽁꽁 싼 아기를 안고 소파에 앉아있는 산모에게 축복 기도를 해주고. 고등어 맛있게 굽는 법 등, 친절한 요리법까지 알려주었는데도 고맙다는 인사는 끝내 못 듣고 나왔다. “기분이 이상해. 우리가 너무 오버한 것 아니야? 피곤해서 밑반찬을 더 많이 안 한 게 오히려 다행이네.” 친구는 여섯 시에 저녁밥을 먹는다는 산모의 시간에 맞추려고 일부러 기다렸다가 잡채를 하며 정성을 쏟았다. 아무런 수고도 없이 기저귀 한 박스만 덜렁 사들고 온 나도 억울한 기분이 드는데 친구는 어떨까싶다. “내 마음도 그래. 본인은 고맙지도 않은데 우리끼리 괜한 짓을 한 것 같아. 그런데…….”
나는 옛날 생각이 났다. 그러니까 우리가 미국에 첫발을 디딘 해였다. 11월에 도착하여 어리둥절하는 중에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이웃집은 창문 너머로 반짝이는 트리와 그 밑에 수북이 쌓인 선물 상자가 따뜻해 보였지만 낡은 창문이 덜컹거리는 우리 아파트는 크리스마스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선물을 들고 갈 곳도, 선물을 들고 올 친구도 없다는 사실이 쓸쓸한 이브 날 오후, 중년을 훨씬 넘긴 집사님 부부가 쌀을 한 포대 들고 찾아오셨다.
방이 밝아서 좋다는 덕담과 함께 기도도 해주셨다. 두 분이 가시고 난 후, 엉거주춤 깎아 낸 과일 접시를 치우며 남편과 나는 갸우뚱했다. 왜 오셨을까?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면 아이에게 줄 과자나 일상용품을 사오셨을텐데 웬 쌀이야? 지나가다 들리셨나? 어디서 공짜로 생긴 건가? 우리는 의아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극빈자 취급을 당한 것 같아 살짝 기분이 나쁘기도 했다. 그 쌀은 며칠이나 우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어느덧 40여 년이 지나가고 중년을 훌쩍 넘긴 이제, 나는 안다. 함께 어울리지도 않는 연령대의 부부에게 관심을 주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바쁜 이브날 오후에 다우니에서 엘에이까지 30분 거리를 운전해서 온다는 것이 얼마큼 힘든 일인지를.
“그분들은 가난한 젊은 부부에게 다른 것보다 쌀이 더욱 필요할 거로 생각하셨을 거야. 지금 돌아보니 정말 고마운 분들이셨어. 감사한 줄도 모르고 감사하단 표시도 할 줄 몰랐던 게 죄송해. 저 부부도 다음에, 나이가 더 들어 우리 나이쯤 되면 그때에야 참 고마운 권사님들이셨어. 할 거야. 내가 깨닫듯이 말이야.” 내 얘기를 듣고 있던 친구가 창밖을 바라보던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그래, 크리스마스 날에 참 좋은 일 했다.” 우리는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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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희 소설·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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