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서울에 체류중일때 마침 국회가 첫 여성 총리 지명자에 대한 청문회를 열고 있었다. 애당초 질의에 나서는 국회의원들의 수준에 기대를 걸지 않았지만 막상 생중계로 보도되는 질의장면은 처음부터 초점을 빗나가더니 끝내 실망스럽게 종말을 내고 말았다. 정책이나 비전 등은 아예 건드리지도 않고 장 서리의 신변문제에만 포커스를 맞추며 아들 이중국적문제, 부동산 구입과정 등 지명자의 도덕성을 검증한다는 미명하에 야만적인 질문이 퍼부어졌다. 시정 철학을 논하고 주요 정책 방향을 따져야할 사람들이 엉뚱한 문제들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흐려진 분위기는 끝내 개이지 못한 채 장씨는 짓궂은 개들에게 물린 사람처럼 시종 기분 나쁘고 난처한 표정만 짓다가 싱겁게 물러나고 말았다.
나는 장 상 총리서리의 임명을 내심 반겼었다. 성별에 무관하게 그 분은 과거 어느 총리와 비교해도 훌륭해 보였다. 특히 유명무실한 정치인 총리들에 식상해 총리 무용론까지 신봉했던 터이라 새 인물의 역할에 기대를 걸었었다. 그러나 수많은 정부 고위직 임명자들이 상상하기 힘든 망신만 당하고 물러났듯이 장 서리 또한 꼴사나운 정치판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만약 김 대통령의 인기가 바닥으로 떨어지지만 않았더라도 생사람 잡는 식의 수모는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야당은 물론이고 김 대통령의 졸병이었던 여당 사람들까지 반기를 드는 바람에 장씨는 마치‘시어머니에게 역정 듣고 개 옆구리 차는 식’으로 당하고 말았다는 동정심이 들었다. 서슬 퍼런 대통령 임기 초기에는 평생동지 운운하며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했던 사람들이 임기 말이 다가오니 갑자기 도덕과 원칙에 충실하게 살아 온 사람들로 행세하는 것도 속이 들여다보여 우리를 슬프게 한다. 한국의 국회의원들 가운데서 장 상씨보다 더 깨끗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고 싶다. 이번 일을 계기로 인격을‘개똥같이’아는 풍조가 다시 드러났지만 그것이 나라 전체가 아닌 정치계에 국한된 세태이기를 바랄 뿐이다.
잘못된 전통을 바꾸기 위해서는 상징이 중요하다. 옛날에 비해 나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한국에서의 남존여비 사상의 실체는 여전하다. 한국 경제가 한번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우수한 노동력 확보가 전제조건인데 훌륭한 여성 노동력 참여 없이는 이루질 수 없다. 40년 전 경제개발 초기 단계의 수공업 분야에서 크게 활약한 여성 노동력이 이번에는 두뇌산업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줄 때 한국이 제2의 부흥을 맞을 수 있다. 다행히 뒤늦게 나마 정부는 여성부(영어표기는 더 노골적으로 Ministry of Gender Equality)를 창설하고 여성 권익신장에 노력하고 있다. 여성 총리가 태어났더라면 한국에서의 여성지위는 한 걸음 앞장 설 수 있었을 터인데, 참으로 아쉽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이화 여자대학교는 단과대학 15개에 재학생 수가 1만명도 넘는다. 한국 여성교육의 요람으로 학생수로만 따지면 세계 최대의 여성 교육기관이다. 그만한 대학교의 총장직은 명예나 권위나 업무범위에서 결코 총리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개인적 견해이다. 그런 위치에 있던 분이 임기가 반년도 안 되고 실권도 없고 껍데기뿐인 총리직을 맡기로 결심한 것은 결코 권력이나 명예를 탐해서가 아니라 한국 여성 전체의 지위향상에 일조가 되기
위한 자기 희생차원이 아니었을까 혼자 생각해 본다.
인물을 키우기보다 죽이기에 더 익숙해져 있고 한 개인의 성장보다 추락에 더 흥미를 느끼는 사회 분위기가 바뀌지 않는 한 한국 정계는 성실한 사람이 나설 풍토가 못 된다. 특히 유능한 여성을 발굴하고 후원하는 작업이 더욱 벽에 부딪치게 되고, 그만큼 사회전반의 진보도 더딜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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