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소(전 언론인)
얼마 전 단풍구경을 하고 와서 쓴 나의 글을 본 집사람이 한자(漢字)를 적게 썼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한자가 많이 들어가서 젊은 사람들은 잘 안 읽겠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또 한자를 써야 겠다. <근묵자 흑(近墨者 黑)>이라는 말이 있다. 먹을 가까이 한 자는 먹물이 튀어 묻는다는 뜻이다. 옛날에는 다 붓을 썼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니다.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뜻이다. 정도의 차이가 좀
있을 뿐 나의 경우도 그런게 아닌가 생각한다. 심심하면 읽고 쓰다 보니 옆에서 본 집사람이 촌평까지 하기에 이르렀나 보다. 소위 ‘먹물이 좀 튀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의 작문에 한자가 많이 들어갔네, 마네 하고 전에 없던 참견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그 뿐만 아니다. 몇달 전에도 신문을 보다가 의외의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닌가. 즉 오피니언 페이지를 보다가 묻기를 “이름만 내면 됐지, 무엇하러 직업에 얼굴 사진까지 일일이 내
는 것이냐”고.
그 말을 듣고 내심 ‘부창부수(夫唱婦隨)라더니, 과연 우연 일치로구나’ 하고 느끼면서 모른 척하고 되물어 보았다. “그게 뭐가 이상한데?” 그랬더니 “독자란은 무슨 특별한 사람이 쓰는 글도 아니고 또 신기한 탐험기 같은 글도 아닌데, 이름만 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
느냐”는 것이다.
나의 속에 담아둔 생각 역시 바로 그런 것이었다. 쇠똥말똥과 같은 무수한 일상사의 한 귀퉁이를 잡고 잠시 느낀 바를 쓰는 아마추어의 글에 대한 대접 치고는 지나칠 만큼 융숭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개중에는 “제사 보다 잿밥에 더 맘이 있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
다. 그러나 글이란 잘 쓴 글이나 못 쓴 글이나 그 내용 자체로써의 생명을 지니는 것이지 누가 썼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저명한 박사가 썼다 하더라도 독자가 공감하지 못한다면 그 글의 생명은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 반대로 별 볼일 없는 사람이 쓴 글이라도 독자가 공감했다면 그 글은 산 글이다. 그러니까 독자는 글 자체를 음미할 뿐 누가 쓴 것을 중요시 생각하지 않는다.
하물며 쓴 사람의 얼굴이나 직업에 관심이 있겠는가.
물론 남 보기에 하찮은 글이라도 쓰는 사람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잉크 한 방울이 피 한 방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하지만 그것은 개인사정일 뿐 남이 알아줄 성질이 못된다. 잉크로 썼건, 피로 썼건 사람 눈에서 평가되니 말이다.
흔히 회자되는 말이지만, 글이란 쓴 사람의 인격 뿐 아니라 벗은 몸을 드러내는 행위와 같다고 한다. 심지어는 내장까지 드러내 보이는 것이라고도 한다. 두려운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누구나 글을 쓰는 건 자유다. 그러나 결과에 자유로울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 수긍할 수 있는 것은 ‘신문 지면 구성상 시각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사진이 들어가는게 안 들어가는 것 보다는 훨씬 좋다’는 견해도 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한번은 누렇게 바랜 옛날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어떤 글은 붓을 사용해서 썼으되 그 붓이 이르지 못한 것이 있고, 어떤 글은 붓을 썼으되 그 붓이 제법 이른 것이 있고, 어떤 글은 그 붓의 앞과 그 붓의 뒤에 붓을 안 쓴 곳까지, 모조리 이른 것이 있다. 대저 붓을 쓰되 그 붓이 이르지 못한다면 비록! 열, 백, 천, 만필을 쓴
다해도 다 이르지 못할 것이다. 이런 사람은 차라리 붓을 안 씀이 가할 것이다…” 실로 두려운 경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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