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족한 정착금에 구직도 힘들어…대부분 극심한 생활고
그녀의 이라크 저택은 폭격을 맞았으며 의사로서의 커리어와 미래는 그녀가 자동차 윈드쉴드 위에 놓여 있던 하얀색 봉투를 발견한 날 무너졌다. 봉투 안에는 총알 한발이 들어 있었다. 왓산 얏신이 죽음의 표적이 됐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이라크를 빠져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생명의 위협을 받던 이라크를 빠져 나와 결국 멀리 떨어진 미국에 정착했다.
지난 3년 사이에 3만8천명 이주
꿈꾸던 미국과 다른 현실에 좌절
“그래도 ‘아메리칸 드림’ 믿는다”
그녀가 새로 정착한 플로리다는 전쟁의 공포로부터 피난처가 됐다. 그러나 행복한 결말은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얏신의 첫해 미국생활은 좌절과 굴욕의 연속이었다. 잭슨빌 범죄지역의 작은 아파트와 푸드 스탬프가 그랬다. 그리고 이라크에서 산부인과 의사이면서 건설사 중역이었던 그녀는 직업을 찾을 수 없었다.
금년 31세의 전쟁통역이자 언론인인 사이프 알나세리는 좀 나은 편이다. 이라크 큰 병원의 약사이기도 했던 그는 뉴저지 한 약국의 조수로 일한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교환을 의미한다. 수십 명의 직원을 감독하던 일자리와 안락한 집, 그리고 무성한 정원은 사라졌지만 대신 그는 안전을 얻었다. “우리는 안전하고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하다”고 알나세리는 말한다. “그러나 바그다드에서 땀 흘려 쌓았던 많은 것들이 있다. 나는 동네에서 유명 인사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나를 존경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무에서 다시 시작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매일 나는 ‘옳은 결정을 했다’고 다짐하다가 2시간 후에는 ‘정말 그런가’ 묻곤 한다”고 덧붙인다.
수천명의 이라크인들에게 미국에서의 정착은 의문과 의구심으로 가득한 고통스런 과정이 되고 있다. 이라크인들은 혼란스런 관료제도와 기본적인 필요를 제공하는데 소요되는 자금이 바닥난 소셜서비스를 상대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제 구호기구의 한 관계자는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경제가 나쁜데다가 이들 대부분이 높은 꿈을 안고 건너 온 전문직들이라는 점이 정착을 더 힘들게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라크 전쟁이 시작된 이후 발생한 200만 이라크 난민 가운데 미국에 정착한 사람은 극소수이다. 대부분은 시리아와 요르단 등 이웃 국가들에 정착했다. 지난 3년 동안 미국에 건너온 이라크인은 약 3만8,000명이다. 그 전 3년 동안은 수백명에 불과했었다. 대부분은 난민이지만 미국 정부와 기업을 위해 일한 사람들에게 발급되는 특별비자로 건너온 사람도 있다.
국무부는 이라크인들의 탈출은 2006년 사마라 회교사원 폭격으로 분파 간 유혈충돌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별로 없었다고 말한다. 이라크 난민 구호기관들과 일부 의원들은 미국정부가 이라크 난민사태에 너무 늦게 대응한다고 비판해 왔다. 이 때문에 미국을 위해 일했던 많은 이라크인들이 공격 목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상황이 개선됐다. 연방의회 공청회 후 미국과 관련 있는 이라크인들의 이주를 용이하게 한 법안이 만들어지고 국무부 자문이 임명되면서 2007년부터 이들의 이주에 가속도가 붙었다. 또 오바마 행정부는 금년 여름 이라크 난민문제 조정관을 임명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미국과 연관돼 이주를 신청한 최소 2만명의 이라크인들 가운데 불과 20%만이 지난 2003년 이후 미국에 도착했다. 어떤 신청자는 제3국에서 일자리도 없이 1년 이상 기다리기도 한다. 한 관계자는 “이런 상황은 이들을 아주 잔인한 심리적 수렁에 빠뜨릴 수 있다”고 말한다.
일단 미국에 도착하면 새로운 문제들에 직면한다. 최근 한 구호단체 보고서에 따르면 애틀란타 와 피닉스에서 인터뷰 한 이라크 난민들은 정부와 소셜서비스 기관의 구호가 바닥나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를 작성한 관계자는 “우리는 우리를 도왔던 사람들에게 존엄성을 지키면서 기본적인 도구를 제공할 도덕적 의무가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개탄한다. 대부분의 이라크인들은 이라크에서의 고통과 함께 미국에서의 생존투쟁 스토리를 갖고 있다. 미국 기업들을 위한 식료품 업소 매니저를 하다 바그다드 호텔 내에 리커스토어를 열었던 사미어 오로를 보자. 그는 2005년 눈이 가리워진 채 차 트렁크에 실려 납치됐다. 그의 아내가 자동차와 금을 팔아 마련한 3만5,000달러를 내고 일주일 후 풀려났다. 지난해 그는 가족과 함께 그의 형제가 사는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처음에 받았던 월 1,350달러의 정부보조금(푸드 스탬프와 함께)은 충분했다. 그러나 액수가 점차 줄면서 그는 현재 조카에게서 매월 400달러를 빌려야 하는 처지다. “다시 고통을 받기 위해 이주한 것이 아닌데…”라고 오르는 개탄한다.
국무부는 정착지원 단체들에 미국에 도착하는 난민 1인당 900달러씩을 지원한다. 이중 절반은 렌트 같은 긴급한 필요에 쓰이고 나머지는 공항 픽업 같은 서비스에 사용된다. 난민들은 주 별로 약간 다르지만 최고 8개월까지 현금지원을 받을 수 있다. 한 구호단체가 조사해 보니 이 단체 지부가 있는 주들의 4인 가족 월 지원액은 309달러에서 575달러 사이였다. 생활비로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라는 것이다.
할리웃 영화에서 받은 이미지를 안고 미국에 건너온 이라크인들은 곧바로 냉엄한 현실에 직면한다. “미국에 건너오면 일자리를 찾을 때까지 기관들이 렌트를 대 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꿈이고 천국일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워싱턴 DC에 정착한 39세의 통역관 모하메드 유수프는 말한다. 그런데 막상 구호기관은 그를 월 렌트비 1,750달러짜리 아파트에 입주시켰다. 그는 여기서 이사 나와 지금은 벌레가 기어 다니는 작은 아파트에서 아내, 그리고 네 자녀와 산다.
무스타파 알 와엘리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학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켄터키 루이빌에 사는 그는 아직 안정된 직장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돈만이 아니다. 그는 “문화적 충격” 역시 곤혹스럽다고 말한다. “우리는 할리웃 영화들을 통해 미국을 인식해 왔다. 그런데 그것과 너무 다르다. 매우 힘들다”고 말한다. 이라크에서는 도움이 필요할 때 언제든 친구와 가족들에게 이를 요청할 수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기댈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아메리칸 드림’을 믿기 때문에 미국에 건너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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