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태(시인)
뉴욕 총영사관에서 현지 채용으로 여러 해 일을 하던 내 친구 이 강은 여러 해 전 스스로 목숨을 끊고 저승으로 갔다. 부잣집 자식으로 위로 누이들만 다섯, 아래로 여동생 하나뿐인 명문가 외아들로서 살만큼 살다가 수명이 다해서 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머리에다 총을 쏴서 저승으로 갔다. 왜 그랬을까? 그렇게 간 친구가 나는 일 년 내내 그립다. 그런 관계가 진짜 친구다. 목숨을 끊기 한 달 전쯤 내게 한 말, “야, 만약 네 집 창가에 새가 찾아오거든 모이라도 꼭 주거라, 그 새가 바로 나일 터이니...”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장례를 치루고 집에 와 피곤한 하룻밤을 자고 나니 동이 틀 무렵 유리 창문을 쪼는 새소리가 들려 왔다. 창가에 가 보니 머리가 빨간 새였다. 나는 문득 친구 강이 말이 생각나 모이를 찾으려고 쌀통 쪽으로 달려갔다. 중학교 입학식 때 만나 동무가 된 이 강, 우리는 60년을 넘게 형제보다 더 가깝게 지냈
다.
미국의 전 대통령 아이젠하워 부인 운영 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에 온 후 뉴욕 총영사관에서 현지 직원으로 약 8년간 재직하다가 메릴랜드 의과대학 교수로 있는 작은 누이가 사는 볼티모어로 이사를 가 거기서 살다가 그렇게 갔다. 우리는 오래간만에 만나서도 미소 뒤에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어느 날 나에게 짐 보따리가 U.P.S를 통해서 몇 개 왔다. 발신인을 보니 이 강이었다. 짐을 풀어보니 제가 쓰던 온갖 잡동사니였다. 컵 몇 개, 바이올렛이 심겨져 있는 화분 몇 개, 제가 쓰던 낡은 가죽 허리 띠 외 70여 가지였다. “야! 윤태야, 이 허리띠는 내가 오래 쓰던 것이라 낡기는 했지만 네가 항상 허리에 둘러라, 그러면 항상 너와 내가 함께 있는 것과 같으니 오늘부터 당장 허리에 둘러라!” “이 화분에 물을 줄 때에는 위에서 주지 말고 아래에서 주거라...” 등등 물건 하나하나에 메모를 써 얌전하게도 붙여서 보냈다. 나는 섬뜩했다.
나에게 와서 한 달을 같이 지내던 어느 날, 삼성 종합병원에서 원장쯤으로 근무하던 제 매부가 두뇌 속에 종양이 발견되어 서울에서 집으로 왔다고 부랴부랴 볼티모어로 내려 간지가 3주도 채 안되었는데 보따리를 이런 식으로 보낸다니 섬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곧 전화를 하니 그냥 장난삼이 그렇게 해서 보냈다는 맥 빠지는 말이었다. 그후 약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새벽, 강이의 작은 누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윤태야, 강이가 죽었다!” 그 길로 달려간 강이의 작은 누나 고급 아파트, 총으로 자살을 했다는 무거운 말만이 실내 분위기를 침울하게 죽이고 있었다.
유서대로 제가 묻어 달라고 보아둔 공동묘지에 안장을 시켜 주었다. 그리고 비석에 새길 한 줄의 말을 남기고 돌아오니 빨간 싸인 펜으로 급히 쓴 편지가 와 있었다. “야, 윤태야! 나 먼저 간다. 네가 좋아 하는 정종을 따스하게 데어 놓고 기다릴 터이니 천천히 와라! 배가 몹시 고프다. 그때 아무도 없는 비오는 만리포 모래사장에서 너와 내가 굶고 있었던 날처럼 배가 고프다!” 아니, 세상이 고파서 몸부림을 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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