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직(뉴욕낭만파클럽 총무)
박종호 감독님, 회자정리(回者正離)인가요? 운명은 재천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지난 29일 사모님으로부터 접한 박 감독님의 부고 소식이 왠지 세월의 허무함과 허전함으로 다가옵니다. 이곳 뉴욕에 계시면서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영화 예술인으로 긍지를 유지하며 지나오신 박 감독님의 모습이 지금도 제 눈앞에 아른 거리고 있습니다.
수난의 한국근대사에 관해 대화를 함께 나누면서 인생의 교훈이랄까요? 희로애락으로 점철된 수 많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쩔 수 없는 생의 끝자락에서 마지막 한 잎처럼 떠나야만 하는 인간의 운명. 누구에게나 닥치는 이 운명에 대해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죠. 박 감독님의 지난 생을 돌아보면 너무도 새롭습니다.
1979년 한국 현대건설에서 중동지원 관계로 만나 매달 주시던 3편의 영화는 중동근로자들에게는 고국의 어머니 품처럼 위안과 위로로 다가와 근로의 의욕을 주었던 청량제같은 것이었습니다.감독님은 당시 참으로 멋지고 낭만적인 분이셨습니다. 인생유전(人生流轉)인지 뉴욕에서 다시 만나 뵙고 못다 한 그간의 사연을 듣고 서울과의 인연으로 뉴욕에 낭만파클럽을 만드시고 저에게도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셔서 지금까지 함께하면서 참으로 뜻있는 시간을 보내왔습니다.
김소월을 주제로 한 시의 밤, 만주용정 고향을 다녀오시고 서사시 윤동주를 그리는 밤 등을 참으로 유쾌하면서도 진지하고 성대하게 치렀지요. 모차르트 200주년 기념 음악의 밤, 최초의 가면무도회 밤 등 이 많은 행사들은 모두 감독님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됐지요. 감독님은 한국 근대영화사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셨습니다.저 만주용정에서의 일제식민지 시절 윤동주시인의 후배로서 용정 중등부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영화 시나리오를 전공하시고 선구적인 영화 예술 거장으로서 감독님은 상도 많이 받으셨지요.
6.25이후 낙후한 어려운 시절 충무로를 중심으로 여러 숨은 에피소드를 들려주시면서 언젠가는 한권의 단행본을 만드시겠다고 의욕을 보이셨지만 이렇게 벌써 떠나시다니요. 못다 한 꿈 많으셨겠지만 이제는 고국에서 사랑하는 가족 품에서 눈을 감으셨으니 마음이 놓입니다. 부디 이곳 뉴욕을 잊지 마시고 저세상에서도 그 멋진 낭만은 꼭 지키시고 저희 모두에게 주셨던 인자하고 다정하셨던 그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시길 비오며 삼가 천국에서 영생하시기를 거듭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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