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트리
▶ 78피트 높이, 4만5,000개 오색전구 장식 전시 후엔 ‘사랑의 집 짓기’ 목재로 기증

지난 2일 화려한 점등식을 가진 록펠러센터의 크리스마스트리. 세계에서 가장 큰 크리스마스트리로 새해 1월7일까지 전시된 후 78피트의 이 트리는 사랑의 집짓기, 해비타트 운동을 위한 목재로 사용된다.

1931년 12월24일 뉴욕 미드타운의 록펠러센터 건설현장의 인부들이 크리스마스트리 옆에 모여 있다. 높이 20피트의 이 발삼나무는 당시 크랜베리 스트링과 공사장 연장 부속품, 은박지접기 등으로 장식되었다.
금년에도 12월이 시작되면서 뉴욕 록펠러센터 크리스마스트리 점등식이 화려하게 열렸다. 지난 2일의 점등식에는 50만 인파가 몰려들어 유명가수들의 축하공연을 즐기며 세계에서 가장 큰 크리스마스트리의 아름다운 불 밝히기에 환호를 보냈다. 금년에 낙점된 트리는 높이 78피트, 직경 47피트, 무게 10톤에 달하는 수령 80년의 노르웨이 전나무. 2만5,000개의 크리스탈이 박힌 스와로브스키 별과 4만5,000개의 오색빛깔 LED 전구로 장식될 금년 트리도 1월7일까지 전시된 후엔 해비타트 운동의 집짓기 목재로 기증될 예정이다. 전 세계에 크리스마스의 시작을 알리며 명절의 설렘을 주는 크고 화려한 이 크리스마스트리의 시작은 가난한 이민노동자들의 소박한 꿈이 담긴 춥고 험한 공사장에서였다.
1931년 크리스마스이브, 뉴욕 미드타운 맨해튼 공사장에는 작업복에 낡은 자켓, 모자를 눌러 쓴 50여명의 인부들이 한 주의 임금을 받기 위해 줄지어 서있었다.
추운 날씨, 험한 작업에 늘 지쳐있던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자신들이 만든 크리스마스트리가 옆에 서 있어서였을 것이다. 20피트 크기의 발삼나무엔 크랜베리를 꿰어 만든 줄이 둘러졌고 연장을 포장했던 은박지로 접은 장식물들도 달려있었다. 그곳은 현대도시 건설을 위해 암반을 폭파해 터를 닦는 공사현장, 그들이 서 있는 돌무더기 땅은 록펠러센터가 될 곳이었다.
2년이 지나 록펠러 플라자가 오픈하자 첫 크리스마스트리 점등식이 열렸고 그후 연말의 연례축제가 되어온 점등식은 올해로 83회를 맞았다.
그해의 트리가 낙점되면 록펠러센터 수석 정원사의 지휘아래 1년 내내 관리를 받게 된다. 금년에도 여름동안엔 격주로 1,800갤런의 물을 주는 등 보통 과제가 아니지만 그럴만한 가치는 충분하다고 에릭 포즈 수석정원사는 말한다. 매년 1,800만명에 달하는 관람객들이 모여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 번째 크리스마스트리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대다수가 이탈리아 이민인 공사장 인부들이 세운 트리다. 땅을 파는 공사장 막노동은 힘들었지만 이들은 대공황의 와중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불평하지 않았다.
“우리 할아버지가 트리를 골라 이곳으로 가져 오셨지요”라고 매사추세츠에 거주하는 스티브 엘링은 말한다.
그의 할아버지 세시디오 페루자는 1880년대 이탈리아 시골에서 출생했으며 초등학교를 3학년까지 다닌 것이 학력의 전부다. 1901년 미국으로 건너와 당시의 많은 이탈리아 이민들이 그랬듯이 굴착공사현장에서 일했다. 위험할 뿐 아니라 온통 흙먼지를 뒤집어써야 하는 막노동이었으며 이탈리아계보다 몇 십 년 먼저 건너 와 자리 잡은 아일랜드계 컨트랙터들의 텃세를 감내해야하는 일이었다. 이들의 관계는 폴 모세스의 저서 “예상 밖의 조합 : 뉴욕의 아이리시와 이탈리안의 애증 스토리”에 상세히 나와 있다.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 19세 때 같은 마을의 16세 소녀 제라다와 결혼했던 페루자는 먼저 미국에 와 열심히 일해 고향에서 기다리는 임신한 어린 신부를 위해 1등석 티켓을 보냈다. 대양을 본 적도 없고, 아이스크림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아내와 세 살 위 남편은 부지런히 일하며 7남매를 부양하느라 그후 고향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그러나 집도 장만했고 지하실에서 남편이 공사장에서 남은 목재로 만든 압축기를 사용해 와인도 만들면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어갔다. 페루자는 때로 아들들을 공사장에 데려와 일을 시켰다. 자신의 일을 돕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눈과 먼지 휘날리는 진흙탕 속에서의 노동이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주며 보다 나은 직업을 갖도록 노력하라는 독려였다.
자신은 착암에서 폭약관리, 발파담당 등을 거치며 지맥을 훤히 읽는 공사장의 베테랑이 되었다. 1955년엔 ‘70세 현직 발파담당자’로 데일리뉴스에 실리기도 했다. 1971년 주택 강도를 당한 후 매사추세츠로 이사했는데 그때까지 지하실에 다이너마이트를 보관하고 있어 경찰 폭발물 전담반이 출동하기도 했었다. 페루자 부부는 이사 후 1년도 못 되어 세상을 떠났다.
페루자의 막내딸인 조세핀 페루자 엘링(90)은 크리스마스 때마다 뉴욕시 건설을 도운 이민자의 한 사람으로 삭막한 건설현장에 크리스마스의 꿈을 심었던 아버지를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기억한다.
“할아버지는 동료 인부들에게서 돈을 걷어 트리를 사셨다고 합니다. 껌 종이와 뇌관들을 사용해 장식물도 만들어 달았다고 늘 말씀하셨지요”라고 스티브 엘링은 말했다.
<뉴욕타임스-본보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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