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거관리위원회‘비방·흑색선전 전담 TF팀’이 주요 대선주자들의 이름을 키워드로 SNS를 모니터링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촉구 촛불시위가 한창이던 지난해 10월 말, 30대 남성 A씨는 트위터에서 눈이 번쩍 뜨이는 기사 하나를 보고 즉시 리트윗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공화당 대선 후보가 “여성 대통령의 미래를 보려면 고개를 돌려 한국을 보라”고 말했다는 내용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나라 망신만 시킨 게 아니라 미국 역사에도 죄를 짓게 됐다’는 글들과 함께 널리 퍼진 이 기사는 이내 여성혐오 발언이라는 반박과 함께 논쟁이 붙었다. 찬반 양측이 첨예하게 부딪친 이 기사는 그러나 가짜 뉴스였다.
노년층만 ‘긴급’으로 시작해 ‘널리 알려주세요’로 끝나는 카톡 메시지에 낚이는 게 아니다. 어엿한 엘리트 교육을 받고 시사에 해박한 젊은 세대도 예외가 아니다. A씨만 해도 소위 말하는 미디어 리터러시(기사를 읽고 쓸 수 있는 능력)가 낮은 사람이 아니다. 다만 그는 여성 대통령의 실정에 극히 분노했고, 이를 지지해 줄 공인된 권위를 복음처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근거 대라니… 가짜 뉴스가 필요해
히트하는 가짜 뉴스에는 법칙이 있다. 도래하지도 않은 그 ‘뉴스’를 이미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와 ‘아니, 이렇게 반가운 소식이’ 같은 반응을 불러일으킨다면 가짜 뉴스로서의 흥행은 보장된다. 수태고지(受胎告知·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의 잉태를 알린 일)를 영접할 만반의 준비가 내면에 갖춰진 상태일 때에야 가짜 뉴스는 폭발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심리가 가짜 뉴스를 유통시키는 토양이죠. 한국사회가 점점 자기 주장이 강한 사회(opinionated society)가 되면서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자기 의견을 꼭 가져야 하는 분위기가 되었잖아요. SNS를 통해 의견을 드러내고 편가르는 게 보편화되면서 자기 의견을 뒷받침해줄 팩트가 필요해지고, 그게 가짜 뉴스의 수요가 됩니다.”
윤태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는 자신의 편견을 강화하는 정보만 수용하려 드는 ‘확증편향’을 가짜 뉴스가 창궐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했다. 기사의 출처나 정확성보다 자기 주장의 근거가 되는지를 기준으로 뉴스를 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뉴스가 너무 많은 미디어 환경도 한몫 한다. 윤 교수는 “쏟아지는 뉴스의 홍수 속에서 정보를 선택적으로 인지하게 되면서 읽는 이의 구미에 맞는 가짜 뉴스가 더 쉽게 와 닿게 된다”고 말했다.
▦이토록 정파적인 개인들
독자의 구미란 정치적 용어로 바꿔 말하면 정파성이다. 사람들이 가짜 뉴스를 읽고 퍼뜨리는 이유가 자신이 속고 있다는 걸 모를 정도로 아둔하거나 팩트 여부를 개의치 않을 정도로 부정직해서만은 아니다. 지지하지 않는 정당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은 가짜 뉴스를 접할 때 정파적 굴절을 일으키는 프리즘으로 작동한다.
정파성은 일반 시민에게도 점점 더 핵심적인 정체성 요소로 작용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다. ‘가짜 뉴스의 진짜 원인은 정파성’이라는 제목의 뉴욕타임스 11일자 기사에 따르면, 1980년대 이래 미국인들은 상대 정당 지지자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더 많이 갖게 됐다.
미국인의 행동양식에서 정파성이 인종보다 더 큰 영향을 준다. 2009년 조사에서 공화당 지지자와 민주당 지지자가 결혼한 비율은 전체 부부의 9%밖에 되지 않았다.
현대의 정파성은 과거 종족과 비슷한 개념이다. 한 인간에 대한 평가는 어느 정당을 지지하느냐 여부에 따라 결정돼 있으며, 이 같은 정파적 편견이 가짜 뉴스의 연료가 된다. 암울하게도 이 같은 경향은 단기적으로나 장기적으로나 개선될 가능성이 낮은 ‘뉴노멀’이라는 게 NYT의 분석이다.
‘박사모’와 ‘문빠’와 ‘안빠’ 사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공방과 비방전을 떠올리면 한국 상황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분석틀이다. 박사모든 문빠든 안빠든 ‘우리 편이 개를 물었다’는 기사는 그럴 리가 없는 가짜 뉴스지만, ‘저쪽 편이 개를 물었다’는 기사는 능히 그럴 만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기성언론은 못 믿어”
가짜 뉴스의 범람에는 기성언론에 대한 불신도 작용한다. 한국 언론은 은폐하는 것이 많고 중요한 것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다는 인식은 뉴스 수용자들에게 ‘직접 저널리즘’의 동기를 유발한다. 김유향 국회입법조사처 과학방송통신팀장은 “정보가 흔해지다 보니 나만 아는 정보에 대한 욕구가 커지고, 이걸 유통시켰을 때의 반향은 희열을 극대화한다”며 “그런 정보에 대한 소구가 점점 더 많아지고 그걸 뉴스의 형태로 제작하기 쉬워진 미디어 환경이 가짜 뉴스를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가짜 뉴스의 유통은 한 사회의 정보유통 수준을 보여준다. 정체불명의 가짜 뉴스가 마구 돌 때 사실확인의 의무가 누구에게 있나. 첫째는 기성 언론에, 둘째는 독자들에게 있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근대적 시민이란 참과 거짓,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판단과 행동을 끊임없이 고민하는 존재이고,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뜻한다”며 스스로 미디어 리터러시를 키우고, 의심스러운 기사는 제보하고 확인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시민의 힘으로 펼쳐진 탄핵 정국 앞에서, 가짜 뉴스에 대해 비난만 하는 주류 언론이나 킬킬거리며 돌려보는 독자 모두 책임감을 느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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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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