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보슬비 내리던 초여름이었다. 한국을 방문한 가족들과 함께 현충사를 찾았다. 기와지붕 위로 빗방울이 미끄러지고, 늙은 소나무들은 빗물을 머금은 채 고요히 서 있었다.
젖은 돌계단을 따라 걷다 보니, 전쟁의 기억과 백성들의 눈물, 그리고 한 사람을 끝내 잊지 않으려 했던 마음들이 빗속에 스며 있는 듯했다.
충남 아산의 현충사에는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하나는 숙종의 친필 한자 현판이고, 다른 하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한글 현판이다. 서로 다른 시대의 글씨가 한 사당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묘한 울림을 주었다.
현충사는 이순신 장군 서거 약 백 년 뒤인 1706년 세워졌다. 아산 유생들의 상소를 숙종이 허락했고, 이듬해 숙종은 ‘충성을 드러낸다’는 뜻의 ‘현충(顯忠)’이라는 이름과 친필 현판을 내렸다. 이는 조선이 이순신을 국가의 정신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현충사의 역사는 순탄하지 않았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사당은 문을 닫았다. 다행히 숙종의 친필 현판만은 후손들이 지켜냈다.
가장 극적인 순간은 일제강점기에 찾아왔다. 1931년 충무공 종가의 빚으로 이순신 장군의 묘소와 위토가 경매에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장군의 묘소와 제사를 지내기 위한 땅, 위토는 단순한 땅이 아니라 조상을 기억하는 정신의 기반이었다.
“충무공의 유적만은 지켜야 한다.”
그 마음 하나로 전국에서 성금이 모였다. 어린아이들의 동전, 백성들의 쌈짓돈 그리고 미국과 멕시코, 일본의 동포들도 나섰다. 나라 잃은 설움 속에서도 충무공의 흔적만은 지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정성을 보탰다.
이 운동에는 국내외 2만여 명과 400여 단체가 참여했고, 관련 기록은 오늘날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단 1년 만에 당시 거금인 1만 6천 원이 모였다. 이것으로 종가의 빚을 갚고, 남은 돈으로 현충사를 다시 세웠다.
1932년 열린 중건 낙성식에는 일제강점기라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수만 명이 몰려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준공식이 아니라, 민족의 혼이 살아 있음을 보여준 집단적 선언이었다.
오늘날 현충사에는 숙종의 친필 현판이 걸린 구본전과 현대식 본전이 함께 남아 있다. 그 사이를 걷다 보면, 단지 한 장군의 생애가 아니라 시대마다 다시 쓰인 한국인의 정신사를 만나게 된다.
현충사에는 또 다른 시간들도 남아 있다. 이순신 장군이 젊은 시절 살았던 고택과 가족들이 사용했던 우물인 충무정, 일본군과 싸우다 스물한 살에 전사한 셋째 아들 이면의 묘소, 그리고 《난중일기》와 장검이 보관된 기념관까지. 그곳은 영웅을 신격화한 공간이 아니라, 한 인간의 삶과 한 민족의 기억이 겹쳐지는 장소다.
우리는 역사를 거대한 전쟁이나 왕들의 기록으로만 기억한다. 그러나 현충사의 진짜 힘은 이름 없는 사람들에게 있었다. 일제강점기 가장 가난했던 시대에, 민족은 스스로 이순신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결국 나라를 지키는 것은 거대한 무기만이 아니다. 한 사람의 이름을 끝까지 잊지 않으려는 마음, 무너진 정신의 집을 다시 세우려는 정성들, 바로 그런 것들이 우리 민족을 살아남게 한다.
그래서 아산 현충사에서 가장 위대한 현판은 글씨가 아니라, 시대를 넘어 충무공을 지켜낸 백성들의 마음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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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선 서북미문인협회 회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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