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할 것같은 예감이 들 때마다 나는 작은 일 하나라도 행복할 ‘거리’를 찾아내 무조건 거기에다 나 자신을 붙여놓고 즐거워하곤 한다. 실상 행복이란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지만, 나는 단순하게 사고하는 인간이므로 별 것 아닌 일에 쉽게 감동하고, 쉽게 행복해한다.
지난 20일은 참으로 행복한 하루였다. 그 날 나는 한 멋쟁이 후배로부터 뉴욕 필하모닉 공연에 초대받았다. 약속 시간에 링컨 센타에 도착해서야 그 날이 바로 뉴욕 필하모닉의 금년 시즌 오프닝 컨서트라는 것을 알았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성장(盛裝)한 유명인사들이 애버리 피셔 홀 로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여자들은 하나같이 이브 생 로랭, 샤넬 등의 유명 브랜드에 스카프까지 저마다의 감각을 뽐내고 있었고, 남자들도 모두 턱시도 차림이었다.
사실 나는 관악기가 강한 뉴욕 필하모닉보다 현악기의 음색이 뛰어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더 좋아한다. 그 날의 연주 역시 뉴욕필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이 드러난 연주였다. 컬트 마주르의 너무 엄숙하기만 한듯한 표정과 직선적인 지휘는 아무래도 음악의 맛을 담기에는 좀 뻣뻣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뉴욕필을 보고있으니 여러가지 상념들이 오갔다.
뉴욕필은 다른 오케스트라와는 달리 첼로가 무대 가운데 앉고, 바이얼린이 왼쪽, 비올라가 맨 오른쪽에 앉는다. 악장은 여전히 글렌 딕터로우였으나 첼로 수석은 바뀌었다. 내가 좋아하는 론 먼로 교수가 수석으로 앉아 있을 때에는 첼로 자리가 그렇게 멋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스케일이 크고 화려한 테크닉과 뛰어난 음악성을 자랑하는 론 먼로는 솔로 연주도 많이 한 줄리아드 교수였다. 그가 없는 뉴욕필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콘트라베이스의 거장 유진 레빈슨은 여전히 뒷자리에서 백발을 날리며 열정적으로 연주하고 있었다. 오래 전 일이지만 아스팬 여름음악축제에서 그가 그 커다란 베이스를 가지고 빠른 바이얼린 곡들을 쉽게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서 자지러지지 않은 청중이 없었다. 그리고 바이얼린 파트에서 우리나라 출신 김명희, 함혜영, 리사김의 얼굴을 보니 괜히 반가웠다.
미국 와서 산 20년동안 뉴욕필의 연주를 가끔 보긴 했지만 오프닝에 참석한 건 처음이었고, 미국 청중들이 하나같이 턱시도와 값비싼 이브닝 드레스로 성장한 모습을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청중 중엔 우리 아파트에 사는 피아니스트 제프도 있었는데, 키가 큰 그는 칼라와 소매 부분에 번쩍이는 장식이 달린 하얀 턱시도를 휘날리며 걷는 바람에 눈에 띄었다. 음악회 보다도 화려한 미국 상류사회의 한면을 본 것같아 흥미로웠다.
그러나 그 날 내가 행복했던 가장 큰 이유는 길가에 차를 파킹할 수 있었던 행운이었다. 링컨센터에 가면서 파킹장에 차를 넣지 않기는 정말 오랜만이다. 차로 66가 브로드웨이를 지나고 있을 때, 옛 줄리아드 입구 맞은편에 자리가 한 개 비어 있는 것이었다. 뉴욕에 살면서 행복한 일 중의 하나가 이렇게 공짜 스트릿 파킹을 할 수 있을 때이다.
가을이다. 가을은 너무 아름다운 계절이다. 그 아름다움을 시샘하는 걸까. 많은 사람들이 가을만 되면 우울증에 시달린다고 호소한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이맘 때쯤이면 괜히 앓기 시작해서 해를 넘겨 봄이 돼야 기운을 차린다. 그런데 이번 가을은 그렇게 우울할 것같지 않다는 예감이 든다. 스스로 우울하기로 마음먹었던 계절병이 뉴욕필 오프닝에 갔던 행운으로하여 이 가을엔 찬란한 단풍처럼 아름다운 꿈을 꾸자는 다짐으로 바뀐 것이다. 역시 일상의 번잡함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문화적 향취에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적어도 내게는 이 가을이 내린 축복의 하나처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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