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당했다.
부의 상징인 맨해턴의 월드 트레이드센터가 뽀얀 흙먼지 속에 주저앉았고, 힘의 상징인 국방부 청사의 한 귀퉁이가 화염에 휩싸인 채 무너져 내렸다.
110층짜리 건물 두동을 간단히 쓰러뜨리고 펜타곤의 일각을 부수는데 사용된 무기는 납치된 민간인 여객기였으며, 범인은 비수로 무장한 테러리스트들이었다.
원시적 무기를 휘두르는 수명의 여객기 납치범들이 세계 유일의 수퍼파워라는 미국의 심장을 찌른 셈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억장이 무너질 일이고, 과격 회교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보자면 웃다 죽을 일이다.
그러나 식칼을 든 납치범들이 미국의 심장을 찔렀다는 문장의 가운데에 "민간 여객기를 미사일로 사용해"라는 삽입절을 끼워 넣으면 얘기가 확 달라진다. 미국의 자존심을 구겨놓은 납치범들은 그 삽입절로 인해 ‘성전의 전사’에서 고약스런 ‘살인기계’로 전락하고 만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테러사건이 터진 후 발표한 담화문에서 선(good)과 악(evil)이라는 대립어를 등장시켰다. 미국과 익명의 테러세력 사이의 대결을 선과 악의 싸움으로 등식화한 것이다. 이같은 이분법은 웬만한 경우 냉소를 자아내기 십상이다. 유아독존의 오만함과 유치함이 흠씬 묻어나기 때문이다. 정의의 독점은 불의의 공유만큼이나 위험하다. 둘 모두 가치의 상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를 게 없다.
하지만 "대통령의 직책을 수행할 만한 지력을 갖추었는지 의심스럽다"는 평가를 받았던 부시 대통령이 선과 악의 대결을 입에 올렸을 때 코웃음을 치거나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비무장 민간인이 탄 여객기를 미사일로 사용해 자살공격을 감행한 테러범들의 흔들림 없는 정치적, 혹은 종교적 소신은 방법론상의 비열함과 잔혹함으로 인해 ‘악마적’이라는 수식어를 감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정이 어찌됐건 간에 미국은 이번 ‘가미가제 테러’로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보복과 응징을 요구하는 여론이 들끓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크고 작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민의 90%가 테러 세력에 대한 무력 응징을 원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와 CBS 뉴스가 별도로 실시한 이번 여론조사에서 응답자들 중 상당수는 "집단의 안전을 위해 개인의 자유가 조금은 유보되어도 좋다"는 견해를 보였다. 감정이 격앙된 상태에서 나온 반응을 사회구성원 전체의 견해로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만, 어쩐지 기분이 개운치 않다.
대단히 이기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집단의 안전이라는 명분에 눌려 내가 누리는 조그마한 자유의 일부를 헌납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다. 핵미사일을 동원해서라도 테러리스트를 ‘싹쓸이’ 해야 한다며 목청을 높이는 정치인에게 표를 주고 싶은 마음도 없다. 집단의 안전을 앞세워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는 사회에서, 핵공격을 ‘빈대약 살포’처럼 가볍게 입에 올리는 정치인과 함께 살고 싶었다면 미국이 아니라 이라크로 이민을 갔을 것이다.
미국인들은 지금 한껏 격앙된 상태고, 그게 오히려 당연한 일이겠지만 조급한 마음을 잠시 가라앉히고 조셉 바이든 민주당 상원의원이 제시한 ‘소수의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아량을 가졌으면 한다. 바이든 의원은 강경발언의 홍수 속에서 다음과 같은 경고를 내놓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개인의 자유를 부수적 가치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100명의 테러리스트를 제거하기 위해 400명의 양민을 해쳐도 상관없다는 발상은 우리가 비난하는 상대방의 논리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보복의 수위를 검토중인 부시 대통령이 미국민의 피끓는 분노와 함께 "넘침은 부족함만 못하다"는 점까지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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