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비록 휠체어에 의지해 있지만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든지 가서 도와 드리겠습니다."
7일 우드사이드 임마뉴엘 성결교회에서 만난 장영자(62)씨는 너무도 당당했다. 정작 자신이 장애인이면서도 남의 도움에 기대기는커녕 오히려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주며 살아온 인생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나 보다. "제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생각은 잊어 버렸습니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 누군가의 어려움을 돕는다는 일은 언제부터인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라고 생각하며 살게됐습니다"고 한다.
90년 자마이카의 인디펜던스 리빙 센터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한 이래 장애인선교회, 경로회관, 앨머스트 병원, 퀸즈 블러바드 데이케어 센터, 미국장애인협회(American Disabled Association) 등등 각종 장애인 관련 기관에서 장씨의 도움을 받은 한인과 미국인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영어 통역에서부터 장애인 및 노인들을 위한 의료 혜택, 주택 신청 대행, 프로그램 운영에 이르기까지 장씨가 해낸 봉사활동은 비장애인들조차 견주기가 부끄러울 정도다.
’한인 장애인들의 대모’가 되기 위한 시련은 76년 서울 장충동의 자택에서 시작됐다. 여성 의류 전문점을 운영하면서 남부러울 것 없었던 장씨는 어느 날 2층 베란다에서 키우던 꽃나무에 물을 주다가 발을 헛디뎌 1층 장독대 모서리에 등뼈를 다치게 됐다. 세브란스 병원 신경외과에서 별의별 치료를 다 받았지만 끝내 두 다리로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됐다.
실의에 빠져 3차례나 자살을 기도하다가 마지막으로 택한 방법은 미국행이었다."한 가닥 기대를 걸고 77년 아들(강우혁·34·버지니아 거주)과 함께 뉴욕으로 왔지만 삶은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데다 불편한 몸으로 공부하러 다니기도 어려워 집에만 처박혀 있었죠. 한 4년 정도 지내다 보니 ‘이래선 안되겠다’는 생각에 82년 우드사이드에 있는 조셉 부로바 스쿨에서 보석 가공, 디자인 공부를 시작했고 관련 분야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항상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죠. 결국 88년 라과디아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사회복지를 배우면서 제 일을 찾게 되었습니다"고 회고했다.
요즘도 일주일에 이틀은 교회에 나와서 자원봉사를 하고 하루는 미국장애인협회에서 일하고 또 장애인선교회 등도 수시로 들러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찾고 있다는 장씨다. 비록 다리는 쓰지 못하지만 신경은 살아있어서 오래 앉아 있으면 통증이 오고 오후만 되면 다리가 퉁퉁 붓는다고 한다. 취재하고 있는 기자가 여자였다면 등을 한번 만지게 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휠체어에 똑바로 앉아 있기 위해서 철심을 4개나 대고 있는데 요즘 같은 여름이면 등이 땀에 멱을 감는다고 한다. 하지만 할 일이 너무 많아 가만히 있지 못할 만큼 바쁘단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는 차별을 받을 때가 가장 가슴 아파요. 봉사활동을 위해 찾아간 사람이 저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을 때면 ‘내가 왜 이러나’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제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좌절하거나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용기를 얻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숨을 고르고 도와줄 누군가를 다시 찾게 됩니다"고 말했다.
<장래준 기자>
jraju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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