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과수원을 장만하신 것은 아마도 1950년이 되기 1년 전이었을 것이다. 왜 1년 전이냐 하면, 1950년이 되었을 때에 “올해에는 여름에 천안의 과수원으로 피서를 가자. 담임 선생님들도 초대하자.” 라고 아버지가 여러 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서를 가기는 커녕, 6.25를 맞이한 우리는 서울에서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 그 해의 여름을 보냈었다.
아버지는 3개월 동안 그림자 처럼 집안에서 숨어 살았다. 그리고 겨울이 오자마자 후퇴하는 군인들 보다도 더 먼저 가족들을 데리고 천안의 과수원으로 피란을 하시었다. 그것은 1.4 후퇴 후에 우리가 10년 동안 지냈던 천안에서의 시절이 시작됨을 뜻하는 것이며, 나의 십대가 허술하게 지나갔던 시절이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3천 평의 밭 한 편에 자그마한 토담집을 지어 놓고, 뒷쪽으로는 화장실, 앞쪽으로는 돼지의 축사, 텃밭에는 포도나무를 60그루 심어놓으시고 남은 땅에는 참외, 수박, 고구마, 땅콩, 토란, 감자, 깨, 고추와 상치 따위를 계절에 따라 심기도 하였다. 울타리 밖에는 복숭아 밭이이었던 과수원에서 우리의 피란살이가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농부가 되었으며, 우리 형제들은 모두 시골학교에 편입을 하였다.
동네와 따로 떨어져서 과수원 가운데에 집을 짓고 살고 있는 서울사람들이 마을에서는 흥미로운 존재였다. 집 둘레에는 꽃과 나무들, 그 중에서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은 것은 우리집의 울타리였다. 아카시아의 꽃이 만발을 할 때에는 아름다운 꽃향기가 사방으로 펴져나갔던 울타리. 텃밭과 집을 둘러싸고 있던 그 긴 울타리는 아버지가 심어놓은 아카시아 나무들이었다. 텃밭에 심은 농작물에는 전혀 어울리지가 않는 그 울타리가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는데, “임주사, 이 아카시아는 농토에는 아주 나빠요. 이것은 어서 뽑으셔야 하는 나무에요.” 그러나 농사가 직업이 아닌 나의 아버지는 아직은 어렸던 아카시아나무의 가지치기를 하면서 “이 꽃이 모두 피어나면, 얼마나 멋이 있을 것이냐?” 라고 말씀하셨다.
캐서린 햅번이 주연을 하고,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하는 서양영화에서 남자들이 썼던 모자. 마치 사파리를 나가는 사람처럼 그와 똑같은 모자를 쓰고 아카시아 나무의 가지를 치시던 우리 아버지는, 농부가 아니라 멋쟁이 정원사 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전쟁중에 남자들이 많지 않았던 시절, 일꾼이 부족했던 과수원의 복숭아 나무에는 엄청난 숫자의 풍뎅이가 몰려와서 잔치를 벌리기도 하였다. 결국 복숭아 밭은 나중에 보리밭이 되었으며, 아카시아나무도 키가 크게 자란 나무들이 되었다. 그러나 60그루의 포도나무는 건재하여서 우리들 5남매, 우리의 사촌과 육촌들, 그리고 특히 나의 친구들이 몰려와서 해마다 포도를 모두 먹어치우곤 하였다. 포도가 익어서 탐스러운 모습을 나타내는 계절이 되면,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의 과수원, 그 포도나무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떠올린다.
지금은 사라진 아버지의 과수원. 아버지의 낭만이 머물었던 그 과수원의 자리가 지금은 집들이 가득 들어선 도시의 한 복판이 되어 있다. 과수원을 아늑하게 둘러싸고 있던 야트막한 동산들도 이제는 평지가 되어 아파트 단지들이 늘어서 있다. 우리가 보냈던 어린시절의 과수원은 더 이상 아무도 알아볼 수가 없는 추억의 이야기일 뿐. 집앞을 흐르던 도랑과, 비가 온 후에는 마당에서도 미꾸라지를 잡았노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깔깔깔 웃어대던 젊은이들의 모습이 싱그러웠다. 그것은 태고적의 이야기 처럼 신기하고, 동화의 이야기 같이 맹랑하기도 한 우리들만의 이야기였다.
9월의 포도가 탐스럽게 익어있다. 아버지의 과수원이 꿈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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