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유공자 애국장 추서 김형순 선생 안장
▶ 95년 전 ‘독립만세’ 함성 생생
※ 광복 70돌 특별 기획
【제3편 미주 독립운동의 성지 리들리·다뉴바】
미주 한인 초기 이민자들의 독립운동 성지인 중가주 리들리.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선명했다. 눈이 시리도록 따가운 한여름 햇볕에도 불구하고‘그’의 이름은 묘비에 또렷하게 새겨진 채 마치 누군가 불러주길 원하듯 하늘을 우러르고 있었다. 나라를 잃은 동시대 젊은이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가슴 시린 감동을 준 윤동주 시인의‘서시’가 떠올랐던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읊조리며 당당하게 파란 하늘을 향하듯 누운 묘비. 1886년 경상남도 통영 출생, 미국 이름 해리(Harry) S. 김(Kim), 한국 이름 김형순 선생과는 그렇게 조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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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생긴 중가주의 리들리 공동묘지(Reedley Cemetery)는 전형적인 미 서부 전원 마을 한편에 평화롭게 자리 잡고 있다. LA에서 북쪽으로 200마일가량 떨어진 이곳 주변에는 온통 수박과 호박, 포도와 복숭아가 흐드러지게 익어가는 시골 모습 그대로다.
영면에 든 178인의 이민 선조들이 모셔진 이곳에서 김형순 선생의 묘를 확인한 뒤 반가움에 앞서 마음 한편이 먹먹해짐을 먼저 느낀 것은 2011년 한국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에게 부여하는 7등급 훈격 중 네 번째인 애국장을 추서한 애국지사인 그가 평범하기 그지없는 공동묘지에 모셔진 까닭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를 보면 이런 소박한 평화는 아마 본인이 원했을지 모를 일이다. 1903년 1월 제1차 노동이민단으로 하와이에 첫 발을 내디딘 뒤 1916년 리들리에 정착, 피땀 어린 노력으로 미국인도 부러워할 정도의 만석꾼이 된 그는 ‘김형제 상회’를 설립, 털 없는 복숭아 재배로 큰 부를 축적했다.
이민선조 최초의 백만장자, 성공한 이민자의 해피엔딩이 떠오를 법하지만 불행하게도 그에게는, 당시 선조들에게는 조국이 없었다. 이민자로서의 설움을 하소연하는 것도 사치였다. 평생 축적한 부를 그는 조국 해방과 한인들의 권리신장을 위해 쾌척했다.
리들리 공동묘지에서 북쪽으로 리드 애비뉴를 따라 1.3마일 올라가면 상회가 있던 자리로 동포 한인들을 취업시키며 초기 코리아타운이 형성됐다. 상회 자리인 I 스트릿과 리드 애비뉴 주변에 독립운동 유적지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곳 사거리의 상회 자리는 지금은 사유지로 남았지만 이곳에서 김형순 선생은 해방이 되기까지 30여년간 모두 5,337원의 독립 지원금을 전달했다. 당시 서울의 집 한 채 값이 1,000원 정도였다니 기와집 다섯 채가 넘는 거금을 헌납한 셈이다.
길 건너의 1955년 지어진 선생의 자택은 당시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관심을 모았던 곳이고 이를 마주하고 상회의 공동 창업자이자 사돈인 민족교육가 김호 선생이 살았던 집도 있다. 그리고 사거리의 마지막 남은 모퉁이에는 익숙한 모양의 건축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서울 서대문에 위풍당당 서있어야 할 독립문이 3분의 1 크기로 축소돼 자리 잡고 있다. ‘리들리 한인이민 역사 기념각’이라고 명명된 이 조형물은 단단한 화강암이 뿜어내는 위용과 더불어 그 앞에 이승만, 안창호, 한시대, 김호, 김형순, 김종림, 김용중, 이재수, 송철, 윤병구 선생 등 미 서부에서 활동한 애국기사 10인의 기념비가 자리 잡아 엄숙함을 자아낸다.
원래 공원으로 사용되던 이곳에 이방인들이 세운 조형물을 주민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기념각 뒤편에서 친구와 열심히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있는 스티브란 소년은 “‘Independence Gate’라고 쓰여 있는데 크기는 좀 작지만 파리의 독립문만큼 멋진 것 같다. 한국이 독립한 것을 기념해서 세웠다는 걸 안다”고 아는 척 한다. 같은 독립의 역사를 가졌기 때문일까, 벽안의 소년에게도 한국과 해방의 역사는 낯설지만은 않아 보였다.
한인 인구가 늘면서 이승만 박사와 안창호 선생도 자주 이곳들을 들러 애국의식을 고취하는 연설을 하게 됐다. 인근의 버지스 호텔은 이들이 머물던 곳으로 중가주 한인들과 이 호텔에서 독립운동을 논의했다. 이승만 박사와 안창호 선생의 영상이 새겨진 기념동판이 있는 곳으로 한때 한국 문화재청이 매입 추진을 검토하기도 했다.
리들리에서 동남쪽으로 8마일가량 떨어진 다뉴바에서는 95년 전 ‘대한독립 만세’가 우렁차게 터져 나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지 1년 뒤인 1920년 3월1일, 중가주 한인 300여명이 이곳에서 3.1운동 1주기 기념행사를 열었다.
교통,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탓에 조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한인들이 벼르고 별러 1주년 기념행진을 했다. 지금은 이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서 있고 2012년 3월에는 그날을 기억하며 다뉴바시와 한인단체들이 합심해 시가행진 후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뒤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등 1주기 기념행사를 재연하기도 했다.
■ “일본 뛰어넘어 공생의 길 가야 할 때”
“해방을 통해 우리 민족은 일제가 가한 억압과 멸시에서 벗어났습니다. 오늘날 미주 이민사회에서 이제는 우리가 오히려 타인종을 배척하지 않는지 돌아봐야 합니다”중가주 한인역사연구회의 차만재(사진) 회장은 광복 70돌의 의의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오히려 도발적인 역질문으로 대응했다. 프레즈노 자택의 서재에서 마주 앉은 그는 달포 전 지병에 따른 수술을 받았다고는 믿을 수 없게 순간 안광이 번뜩였다.
차 회장은 “해방(liberation)은 풀려남을 뜻하는데 미국에 사는 한인이라면 깊게 생각해 볼 문제”라며 “1865년의 노예해방과 100여년 뒤인 1964년 민권법(Civil Rights Act) 제정은 한민족이 경험한 해방과 공통점이 많다”고 말했다.
일제 강점기에 한민족이 겪었던 멸시, 괄시, 무시가 미국 역사상에서 흑인과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과 괘를 같이 한다는 설명이다. 이는 황국사관과 백인 우월주의라는 명칭만 다를 뿐 근본적으로 인간 존엄성에 대한 깊은 오해에서 비롯된 이기주의의 발현일 뿐이다.
그는 “해방 70돌을 맞아 이제 일본을 뛰어넘어 모든 인종과 공생해야 할 때”라며 “미국에 사는 한인들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우리에게 그랬듯 지금 우리의 이웃인 타인종을 배척하지 않았는지 반성하고 해방의 의미를 새롭게 승화해야만 올바른 해방 70돌의 각성을 완성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차 회장은 다뉴바와 리들리를 비롯한 중가주의 한인 이민역사를 발굴, 보존할 목적으로 2002년 연구회를 발족했다. 중가주 일대에서 10여곳의 유적지를 찾아냈으며 특히 2010년 11월에는 국가보훈처, 리들리시, 리들리와 자매도시인 경남 통영시 등의 지원을 받아 독립문을 축소한 모형의 한인이민 역사 기념각을 세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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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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