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6년 국세청 사칭 이후 17년째, 국가적 우환으로 경각심 높지만 보이스피싱 피해는 전반적 급증세
▶ 대출사기형이나 기관사칭형…8년 새 피해액 5.4배나 늘었지만 돈 뜯는 수법도 진화 막는데 한계
이제 콜센터 직원 대부분 한국인
올해 2월 25일 부산 영도구 도로에 주차된 차량에서 40대 A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유서는 없었지만 보이스피싱 피해를 비관해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추정됐다. 경찰에 따르면 부산에서 자영업을 하며 1억 원 넘는 빚을 지고 있던 A씨는 2월 중순 "지금보다 낮은 금리로 대출해주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코로나 이후 장사가 안 돼 이자 내기도 힘들던 차에 솔깃한 제안이었다. 금융업체를 사칭한 상대방은 "새로 대출하려면 먼저 빌린 돈부터 갚아야 하니 우리 직원에게 돈을 맡겨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그달 21일부터 사흘간 부산, 울산, 대구, 경북 등지로 10차례에 걸쳐 A씨를 불러내 총 1억1,650만 원을 받아갔다. A씨가 주변 친지에게 급히 빌린 돈이었다. 뒤늦게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상대방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A씨 지인은 경찰에 "A씨가 보이스피싱 피해로 매우 힘들어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수금책 일부를 잡아들였지만 총책은 중국에 있어 검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올 들어 8월까지 국내 보이스피싱 발생 건수는 A씨 사건을 포함해 1만6,092건, 피해액은 4,088억 원에 이른다. 매달 2,000명 이상이 1인당 2,500여만 원씩, 총 500억 원 넘는 사기 피해를 당하고 있는 셈이다. 2006년 5월 국세청을 사칭한 일당이 세금 환급을 미끼로 6차례에 걸쳐 5,500만 원을 가로챈 사건으로 보이스피싱 수법이 한국에 상륙한 지 17년째, 이제 국가적 우환으로 국민 경각심 또한 높은 상황인데도 범죄 피해는 단기 등락이 있을 뿐 전반적으로 급증세를 보이고 있다.
정부도 보이스피싱 대응에 진력하는 분위기다. 정부 출범 한 달 만인 지난 6월 범부처 대책회의를 열고 합동수사단(7월 출범)과 통합신고·대응센터(연내 출범 예정) 설립을 결정했고, 지난달엔 관계기관 합동으로 금융 분야 대응방안을 발표했다. 범부처 차원의 보이스피싱 척결 방안이 마련된 것은 2020년 이후 2년 만이다. 대선 후보 시절 '보이스피싱 엄단'을 주요 금융 공약으로 내걸었던 윤석열 대통령도 지난달 한덕수 총리와의 주례회동에서 "서민과 약자를 울리는 범죄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다는 각오로 임해달라"고 당부했다.
다만 정부가 보이스피싱과의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할 거란 보장은 없는 상황이다. 당국 대응책이 나오면 잠시 주춤했다가 머지않아 단속망을 무력화하는 수법이 다시 창궐하는 추세가 반복된 현실을 감안하면 그렇다. 진화하는 범죄 행태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실효성 높은 대응책 설계가 뒷받침돼야만 정책 성공을 담보할 수 있다.
보이스피싱은 범행 수법을 기준으로 △자금 대여나 지원을 미끼로 삼는 '대출사기형' △검찰, 경찰, 금융감독원 관계자로 가장해 접근하는 '기관사칭형'으로 대별된다. 경찰청이 양대 유형 모두를 집계하기 시작한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보이스피싱 사건은 2만1,634건에서 3만982건으로 1.4배 증가했다. 피해액 증가 속도는 더욱 가팔라서 1,429억 원에서 7,744억 원으로 5.4배 늘었다. 사건당 피해 규모가 대폭 늘어났다는 뜻인데, 바꿔 말하면 범인들이 덫에 걸려든 피해자에게 돈을 뜯어내는 수법이 그만큼 진화했다는 의미다.
2013년 이전 통계 기준(기관사칭형만 집계)으로 오르내림을 반복하던 보이스피싱 발생 건수는 이후 현행 기준으로 2014~2016년 감소하다가 반등, 2019년까지 3년간 두 배 넘게 급증했다. 2016년 1,468억 원이던 연간 피해액도 2019년엔 6,398억 원으로 4배 넘게 불어났다. 2020년부터는 사건 수가 내림세로 돌아섰지만 피해액은 연 7,000억 원대로 계속 증가했다. 다만 올해 1~8월은 발생 건수와 피해액 모두 전년 동기 대비 30%가량 줄었다는 것이 경찰청 설명이다.
피해자의 연령대별 비율(2021년 기준)은 중장년인 50대(30.9%)와 40대(21.8%)가 가장 높았다. 경제활동이 활발한 나이대라 대출사기형 보이스피싱의 주요 표적이 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피해자 성별로 보면 대출사기형은 남성, 기관사칭형은 여성의 비율이 높다. 2017~2019년 기준 남성 대출사기형 피해자는 57.8%, 여성 기관사칭형 피해자는 69.0%다.
정부의 오랜 근절 노력에도 보이스피싱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이유는 먼저 범행의 기술적 수법이 부단히 진화하고 있어서다.
초창기 중국 등지에서 국제전화로 범행하던 보이스피싱 조직들은 2009년 당국이 수신자 전화에 국제전화 발신 표시가 뜨도록 조치하자 인터넷전화 사용으로 규제를 피했다. 2011년 통신사기피해환급법 제정으로 사기 이용 계좌에 지급정지 조치가 가능해지고 이듬해엔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지연인출제, 계좌 간 지연이체제 시행으로 범죄수익 수금이 어려워지자, 이번엔 악성코드를 심은 문자메시지로 피해자 휴대폰을 해킹해 직접 돈을 가로채는 스미싱 수법을 결합해 방어망을 뚫었다. 보이스피싱 발생 건수의 시기별 등락은 막으려는 정부와 기어이 돌파하는 사기조직 간 공방전의 흔적인 셈이다.
최근엔 오픈뱅킹이 보이스피싱의 '약한 고리'가 되고 있다. 오픈뱅킹은 특정 금융기관 애플리케이션(앱)으로 모든 보유 계좌를 조회·이체할 수 있는 서비스로 2019년 말부터 시행됐다. 범죄조직 입장에선 오픈뱅킹 앱 하나로 피해자 예금자산을 손쉽게 털 수 있게 되면서, 보이스피싱으로 빼낸 개인정보로 본인 확인 절차가 느슨한 알뜰폰을 개통한 뒤 비대면 계좌를 개설해 오픈뱅킹을 이용하는 수법이 만연한 상황이다. 경찰 관계자는 "피해자는 예금 이체 사실을 곧바로 알아채지 못해 피해 구제를 받기가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피해자가 의심 없이 전화를 받게끔 유도하려 발신 번호를 '010'으로 바꾸는 번호 변조 수법도 '심박스' 장비 도입으로 성행하고 있다. 이 장비는 휴대폰 유심카드를 다수 장착해 범행에 실제 사용되는 인터넷전화 번호를 다양한 이동통신사 번호로 변조할 수 있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명의 도용 알뜰폰 개통으로 유심카드를 다량 확보한다고 한다.
보이스피싱 콜센터 조직원의 화술과 작전도 정교해지고 있다. 콜센터가 주로 해외에서 운영되는 건 예전과 마찬가지로, 지난 7월 기준 검찰이 수사 중인 콜센터의 97% 이상이 중국(87.5%), 필리핀(6.2%), 태국(3.7%) 등 외국에 있다. 다만 중국동포 비중이 높았던 초창기와 달리 지금 콜센터 조직원 대부분은 한국인이라고 한다. 발음이나 억양으로 보이스피싱 여부를 판별하기란 사실상 어려워진 셈이다.
더구나 이들은 조직적 훈련을 거쳐서 범행에 투입되기 때문에 세련된 화술을 구사하는 경우가 많다. 조동욱 충북도립대 교수가 금융감독원이 피해 예방 차원에서 공개하고 있는 실제 보이스피싱 녹음 파일을 분석한 결과 사기범 음성은 일반인에 비해 안정적이고 또렷해 신뢰도를 높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음성 파형에서 규칙성(진폭 및 진동 변화)과 조화성(소음 대 배음비)을 따져본 결과다.
피해자를 낚을 '대본'도 치밀하게 짠다. 전직 보이스피싱 조직원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시나리오팀엔 국내 사정에 밝은 조선족이나 범죄 경력이 있는 한국인이 주로 들어간다"며 "이들이 국내 사정기관 구조, 행정시스템 등을 공부해 가장 현실감 있는 대본을 마련한다"고 증언했다. 코로나 유행기엔 재난지원금 지급을 운운하는 식의 기민한 수법 개발이 이렇게 이뤄지는 셈이다. 통화에 앞서 해킹이나 암거래로 공략 대상의 신상정보를 미리 입수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피해자는 '정보 비대칭' 상황에 몰려 끌려다니기 쉽다. 또 다른 전직 조직원은 "보다 질이 좋은 개인정보를 확보하기 위해 유출 정보를 사는 대신 직접 해커를 고용해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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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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