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아픔을 숨기지 않고 정면에 내세운 도시가 있다. ‘시간 여행 마을’로도 불린다. 일제강점 당시 일제의 수탈이 가장 심했던 전북 군산이다. 역사 관광 개발 사업 초기만 해도 제국주의 미화 논란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역사와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다크투어리즘(역사적 비극이나 재난 현장을 찾아가는 관광) 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100년 이상 된 건축물과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군산에서 역사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여행을 소개한다.
■ 100년 넘은 일제 침탈 현장군산의 역사는 금강 하구 옛 군산항(내항)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내항에서 동쪽으로 약 8㎞ 떨어진 월명산까지 이어지는 지역에 일제강점 당시 세관, 은행, 관사 등 주요 기관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현재는 호남관세박물관(구 군산세관 본관)부터 근대건축관(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등 국가등록문화유산 4곳을 비롯해 주목할 만한 역사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다.
1923년 지어진 근대건축관은 1953년까지 조선은행 군산지점이었다. 당시 한반도 최대 곡창지대 호남평야의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던 군산항의 수익금과 일대 농지 매입 자금을 관리했다. 일제강점기 침탈적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대표 은행으로 꼽힌다. 지점이 위치한 내항 지역의 법정동은 장미동인데 ‘쌀 곳간’을 뜻한다. 1953~1980년까지 한일은행(우리은행의 전신) 군산지점으로 사용되다 민간에 매각돼 유흥주점인 나이트클럽 간판을 단 역사도 있다. 1990년대 화재 피해를 입기도 했다. 2008년 국가등록문화유산에 등재된 후 2013년에서야 복원됐다.
100년 건축물이 즐비한 군산에서도 건축관으로 낙점된 만큼 내·외관이 웅장하다. 실제 층수는 2층에 불과하지만 통상 4층 건물의 높이로 지어졌다. 건립 당시 군산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고 한다. 외부의 황각석으로 장식한 기단과 현관, 급한 경사의 높은 지붕 등이 중앙은행의 권위를 드러낸다.
내부는 2층 중앙을 뻥 뚫어 개방감을 극대화했다. 높은 층고는 당시 공간의 기능보다 은행의 권위와 위상을 중시했던 상징성을 보여준다. 서울 한국은행 본관(현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을 제외하면 유일한 조선은행 관련 문화유산이다. 지금은 사진으로만 남은 서울 중구 소공동 옛 상업은행 본점과 외형이 유사하다.
호남관세박물관은 내항 지역의 국가등록문화유산 중 유일한 사적이다. 1908년 준공돼 연식도 가장 오래됐다. 1993년까지 86년 동안 세관 건물이었다. 소유권이 민간에 넘어가 관리가 부실한 시기가 있던 앞선 두 건물과 달리 준공 이래 국가가 계속해서 소유해 보존 상태가 가장 좋다. 일제강점 당시 사용됐던 감시 청사·망루 등 부속 시설은 망실됐으나 본관 자체는 원형에 가깝게 보존돼 있다.
한국은행 본관, 서울역사와 함께 한국 대표 서양 고전주의 건물로 꼽힌다. 고딕 양식의 지붕, 로마네스크 양식의 창문, 영국식 처마가 사용됐다. 서양의 건축 양식을 적극 받아들이고자 했던 근대 일본의 건축 동향을 볼 수 있다. 외벽의 붉은 벽돌도 벨기에에서 수입해 지을 정도로 공들인 건물이다.
내항의 수변에는 장미동의 네 번째 국가등록문화유산인 세 량의 뜬다리 부두(부잔교)가 있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군산 앞바다에 선박이 안전하게 접안할 수 있도록 고안한 장치다. 고정된 구조물 형태의 항만은 썰물로 수위가 낮아지면 선박이 정박할 수 없다. 뜬다리 부두는 일종의 바지선을 띄운 후 이를 각도 조절이 가능한 다리로 연결해 수위에 따라 위아래로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한 구조물이다. 수탈한 쌀을 쉽게 하역할 수 있도록 일제 치하 1926년에서 1938년까지 사용됐다.
역사가 담긴 중화요리 전문점 건물도 눈길을 끈다. 음식점으로는 드물게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1950년대 초 화교인 왕근석씨가 창업해 대를 이어온 음식점으로 근대 군산에 정착했던 화교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 수탈을 위해 일본 지주가 지은 가옥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적산가옥도 군산에 있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히로쓰 가옥)’은 영화 ‘타짜’의 주인공 ‘고니’의 스승 ‘평경장’의 자택으로 유명하다. 이 가옥은 군산 일대의 대지주이자 미곡상이었던 히로쓰 기치사부로의 자택으로 알려져 있다. 1925~1935년 사이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해방 후 고 이용구 호남제분 창업주에게 팔렸다가 호남제분의 후신인 한국제분이 이후 관리했다. 사조그룹에 기업을 매각한 후에도 이 가옥만큼은 창업주 일가가 계속해서 소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5년 이후 내부는 개방되지 않지만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1층 내부는 제한적으로 관람할 수 있다. 외부와 정원은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 주택 규모가 크고 원형이 잘 보존돼 있어 당시 일본인 상류층의 생활 양식을 보여주는 유산이다. 2층이 무려 12개실로 구성된 대저택이다. 전체적으로 일본 고급 목조주택(야시키) 양식으로 지어졌지만 일부 방은 한국의 기후에 맞게 온돌 난방이 설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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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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