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도소 대학과정 수강·뉴욕법대 졸업
▶ 개인지도 하던 여성 변호사와 결혼도

1975년 35세 복역수 앨런 헤이버.

마약딜러에서 형사 변호사로 제2의 삶을 찾는데 성공한 앨런 헤이버. 지난 6월 싱싱 뉴욕 주 교도소를 방문했을 때 사진이다.
[‘제2의 삶’ 찾은 75세 뉴요커 앨런 헤이버]
중범죄로 10여년 여러 교도소에 수감되었었던 전과자 한 사람이 판사 앞에 섰다. 그러나 앨런 헤이버가 판사에게 자비를 호소한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의뢰인을 위해서였다. 헤이버(75)는 뉴욕의 형사전문 변호사다. 초기의 관선 변호사 경력을 포함하여 지난 30년간 형사변호사로 일하며 갱생이 도저히 힘들어 보이는 중범들을 변호해 왔다. 직업윤리에 따라 그는 언제나 의뢰인의 비밀을 철저히 지켜왔다. 또 하나, 그는 자신의 비밀에 대해서도 입을 굳게 다물어 왔다.
한때 그는 마약딜러였다. 미드타운 맨해튼에서 헤로인을 팔고, 총기를 휴대하고, 마약 은닉처를 운영하며 마약 공급망을 통해 다량의 헤로인을 팔아 하루에 수천달러를 벌었다. 20대에서 30대 초까지 3차례의 마약관련 중범죄를 포함해 10번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가 자신의 이런 과거를 털어놓은 것은 뉴욕법대에서 학위를 받고 변호사 시험을 신청하면서였다. 그 이후로는 어떤 판사에게도, 검사에게도 자신의 과거를 밝힌 적이 없었다. 자신의 의뢰인에게 불이익을 줄 것을 우려해서다. “인생의 패배자였던 나를 누가 신뢰할 수 있겠는가?”그러나 최근 그는 과거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과거의 자신과 같은 처지의 의뢰인들에게 그들도 실수를 만회하고 새 삶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지 않을까 싶어서다.
전과를 가진 변호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헤이버처럼 중범의 긴 복역기간과 성공적인 변호사 경력을 동시에 가진 경우는 드물다.
7~10년 형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었던 한 마약사범에게 2년반 형을 선고했던 한 연방판사는 그 케이스의 변호사였던 헤이버의 전력은 전혀 몰랐다면서 “그러나 재판에서 그는 아주 훌륭했다”고 칭찬했다.
헤이버의 전과기록은 어떤 면에선 이득까지는 아니더라도 변호사로서 통찰력을 갖는데 도움이 된다. 그는 의뢰인에게 범행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진실 그대로를 털어놓을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모든 변호사가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헤이버는 진실을 알아야 검찰과의 협상에서 유리할 뿐 아니라 판사에게도 신뢰감을 줄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의뢰인과 유대를 강조하기 위해 검찰을 ‘적(enemy)’라고 부르면서 “우리가 적들보다 많이 알아야 한다”고 설득한다.
헤이버는 어린 시절부터 불우했다. 포스터홈을 전전했고 아이리쉬 청소년 갱단에 가입했으며 17세 때 백화점에서 바지를 훔치다가 체포되어 1년간 복역했다. 그곳 교도소에서 헤로인을 처음 접했던 그는 출소 후 마약중독자가 되었다.
마약을 사기 위해 차량 절도와 좀도둑질 등 닥치는 대로 범죄를 저질렀다. 20대 초에 이미 7번의 유죄판결을 받고 짧게는 서너달, 길게는 1년까지 복역하며 회전문 드나들듯 교도소를 왕래했다.
30대에 접어들며 좀더 본격적으로 마약세계에 발을 담근 그는 자신의 아파트를 마약 은닉처로 삼아 마약공급 도매상 노릇까지 했다. 돈이 쏟아져 들어왔고 빨간색 캐딜락 엘도라도 컨버터블을 사는 사치도 부려 보았다. 그러나 얼마 안가 다시 체포되었다.
1967년부터 1974년 사이 3차례나 마약관련 중범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도합 12~14년 형을 받았으나 모범수로 10년만 복역했다.
전직 시 교정담당관으로 맨해튼 구치소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샌드라 루이스 스미스가 헤이버를 처음 만난 것은 1970년 대였다. 퉁명스럽고 한 성질 하는데다 팔에 온통 문신을 하고 욕설을 달고 사는 헤이버에게 스미스는 “넌 좋은 죄수도 못 된다, 계속 감옥에 있을거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에게 자긍심과 자신감, 지성을 기르도록 열심히 도운 스미스의 영향으로 헤이버는 새로운 삶에 대한 꿈을 갖기 시작했다. “스미스는 나를 판단하지 않고 내 삶이 두 방향으로 갈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그는 교도소 내 커뮤니티 칼리지 클래스를 수강했으며 인근 대학에서 공부하도록 허가를 받기도 했다. 출소 후엔 뉴욕 유니버시티의 성인교육과정을 마치고 학위를 받았다.
에밀리 제인 굿맨을 만난 것은 집행유예로 나와 있을 때였다. 굿맨은 한참 후 2012년 은퇴하기까지 25년간 주 대법관으로 봉직했던 변호사다.
젊은 변호사 굿맨에게 헤이버는 ‘프로젝트’였다. 유능한 변호사가 될 잠재력을 보이는 헤이버에게 굿맨은 문법과 어휘부터 가르쳤다. “세상에 불가능한 것은 없다”고 격려하는 굿맨은 헤이버에게 훌륭한 동기부여자였다. 그러다 사랑에 빠진 그들은 1983년 결혼했다. (그러나 딸 저스틴을 낳은 후 1990년대 중반에 이혼했고 헤이버는 그후 암 전문 의사와 재혼하여 현재까지 살고 있다.)
굿맨의 격려와 도움으로 헤이버는 뉴욕법대에 입학해 장학금까지 받았다. 당시 헤이버의 입학여부를 놓고 입학사정위원회에선 우려가 제기되었었다. 그의 전과가 임학을 허용하기엔 너무 중범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력이 아니라는 점이 그의 입학허가를 허용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1984년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시험에 합격한 그는 관선변호사로 일하다 93년 개업했다.
뉴욕법대에서 그를 가르치기도 했던 존 섹스턴 학장은 “헤이버의 스토리는 우리사회가 자비의 힘과 인간성장의 잠재력을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다”고 말한다. 헤이버도 요즘엔 자신의 과거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스토리를 들은 범죄자들이 “당신을 믿어도 될 것 같다. 당신은 나의 처지를 이해하고 나를 위해 진심으로 싸워 줄 것 같다”면서 신뢰를 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헤이버는 말했다.
<뉴욕타임스-본보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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