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일 오후 북한 금강 이산가족면회소에서 열린 이산가족 상봉행사에서 남측 이순규(오른쪽) 씨가 북측 남편 오인세 씨를 만나 기뻐하고 있다. 이들 부부는 1949년 결혼해 남편은 이듬해 6.25 전쟁터로 나간 뒤 소식이 끊겼다. 이순규 씨는 남편이 끝내 돌아오지 않자 결국 포기하고 매년 8월 3일을 기일로 정해 37년 동안 제사까지 지냈다. 가운데는 아들 오장균 씨. 2015.10.20.
"65년 만에 만났는데, 그냥 그래요. 보고 싶었던 거 얘기하면 한도 끝도 없지. 눈물도 안 나오잖아요"
이순규(84)씨는 20일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에서 65년 동안 기다렸던 남편 오인세(83)씨를 만나고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남편은 아내의 손을 잡고 어깨에 손을 올리며 반가움을 표현했지만, 정작 이씨는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이씨는 "평생을 (떨어져) 살았으니까 할 얘기는 많지만 어떻게 (3일만에) 다 얘기를 해…, 나는 결혼하고 1년도 못 살고 헤어졌으니까…"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남편 오씨 역시 "전쟁 때문에 그래. 할매, 나는 나는 말이야, 정말 고생길이… 고생도 하고 아무 것도 몰랐단 말이야"라며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1949년 12월 부부의 연을 맺은 이들은 결혼생활 이후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50년 7월 ‘생이별’했다. 남편은 전쟁 발발 직후 "며칠 동안 집을 비워야 한다"는 말만 남긴 채 그 길로 이씨의 곁을 떠났다. 당시 이씨의 뱃속에는 아들 오장균(50)씨가 있었다.
이씨는 아들이 태어난 뒤에는 전국을 돌며 삯바느질과 농사일을 하며 홀로 가정을 꾸렸다. 고향인 청주시 강내면에 돌아와서도 아들과 함께 남편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이씨는 남편이 직접 만든 장기알과 결혼할 때 신었던 구두, 밥그릇 등 남편의 손때가 묻은 모든 물건을 고이 간직하며 한순간도 남편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는 남편이 끝내 돌아오지 않자 37년 전부터 매년 8월3일을 기일로 정해 제사를 지내왔다.
이날 아들 장균씨는 꿈에서만 그리던 아버지를 처음 만나 "아버님 있는 자식으로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저랑 똑같이 닮으셨습니다. 살아주셔서 고맙습니다"라며 큰절을 올렸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