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사망
▶ 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티 새물결 몰고와…독일통일 용인, 경제난과 민족 갈등 겹쳐 몰락
지난 30일 사망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은 동서 냉전의 종언과 소련 해체, 동구 공산권 몰락 등 역사적 격변의 중심에서 영욕의 삶을 살았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54세 때인 1985년 일곱 번째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됨으로써 권력의 정상을 차지했다. 이후 6년 동안 사회주의 혁명에 이은 ‘제2의 혁명’으로까지 불린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티’(개방) 정책을 밀어붙이며 소련과 국제사회에 대변혁을 몰고 왔다.
언론의 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글라스노스티 정책으로 소련 국민은 생각한 바를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되찾았다. 시장 경제 요소의 도입과 기업활동의 자율화에 초점을 맞춘 페레스트로이카는 침체에 빠진 소련 경제에 상당 정도의 활력을 불어넣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은 역대 소련 지도자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매력적이고 지적인 외모를 가진 그는 대중 앞에 서는 것을 좋아했고 TV를 통한 대국민 연설을 즐겼다. 그는 타고난 웅변가였다.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은 ‘신사고’에 바탕을 둔 외교 분야에서 가장 속도를 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집권 8개월 만인 1985년 11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을 만나 화해의 악수를 함으로써 수십 년간 계속돼온 양국 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초석을 놓았다.
이어 미국과 중거리핵전력조약(INF) 및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을 체결하는가 하면 동유럽 주둔 소련군 50만명을 일방적 감축하는 등 굵직굵직한 군축 조치가 뒤따랐다. 이 같은 미-소의 화해 분위기는 마침내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받는 독일 통일과 동구권 민주화의 촉매제가 됐다.
그는 또 1988년 5월 아프가니스탄에 주둔 중이던 소련군을 철수하기 시작해 이듬해 2월까지 철군을 완료했다. 1989년 몰타 미-소 정상회담에서 냉전 종식을 공식 선언한 데 이어 1990년 여름 동ㆍ서독의 통일을 수락했으며 통일 독일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잔류하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또 같은 해 한-소 수교라는 역사적 선물을 한국민에게 안겨주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주의에 대한 마지막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그는 개혁의 속도를 조절하려다 끝내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1990년 여름 급진적 경제개혁안인 ‘샤탈린의 5백일 개혁안’을 거부해 개혁파 인사들과 틈이 벌어졌고, 1991년 8월엔 흑해 연안의 크림반도에서 여름휴가를 즐기던 도중 쿠데타를 일으킨 보수파들에 의해 연금을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보수파의 쿠데타는 비록 ‘3일 천하’로 막을 내렸지만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과 소련 지도부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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